오래된 집은 사람이 떠난 뒤에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벽지와 문틀, 한때 가족의 일상이 머물렀을 방과 마당은 낡고 비어 있는 공간이지만, 예술가에게는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지역에서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온 중견 작가 박수미가 이번에는 빈집을 전시장으로 선택했다. 작품을 위한 공간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자체를 하나의 예술적 대상으로 바라보며 집과 작품이 나란히 호흡하는 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박수미 작가의 개인전 '빈집 에스테틱스(Empty House Aesthetics)'가 오는 14일까지 문화공간 양옥(경주시 봉황로155번길 12)에서 열린다.    2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은 1979년 지어진 2층 양옥을 전시장으로 활용한 점에서부터 특별하다. 오랜 시간 한 가족의 생활공간이었던 집을 새롭게 단장하기보다, 긴 세월이 남긴 고유한 구조와 흔적을 최대한 살려 작품과 결합했다.경북문화재단 전시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를 위해 박 작가는 집 안의 벽면과 공간을 직접 손보고 작품 배치와 설치를 구상했다. 박 작가는 낡은 벽지와 천장, 문틀 등 사람이 떠난 뒤 비로소 드러난 집의 표정에 주목했다. 집을 상업적·문화적 공간으로 바꾸면서 기존의 흔적을 지워내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이 집이 지닌 시간의 층위를 그대로 작품의 배경으로 끌어들인 것이다.박 작가는 "독특한 미학이 남아 있는 옛집의 구조와 현대를 이야기하는 예술 작품이 서로 팽팽한 에너지로 맞서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 가슴이 뛰었다"고 말했다. 그의 기획은 '작품을 집에 맞추거나 집을 작품에 맞추지 않는' 데서 출발했다. 공간을 믿고 작품을 맡기고 작품을 믿고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오래된 집의 차분하고 묵직한 분위기와 선명한 색채, 자유로운 형태의 그의 작품들이 한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전시장은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를 넘어 집과 예술이 함께 만들어내는 하나의 설치작품처럼 다가온다.이번 전시 작품에서도 작가의 새로운 시도와 변화가 읽힌다. 한국화를 전공한 박 작가는 재료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를 구축해 왔다.    수많은 공력의 결과물인 한지 작업에 이어,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때수건을 회화의 재료로 끌어들인 작업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도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때수건의 색을 활용해 잘라 붙이고 겹치는 과정에서 '색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색과 선, 면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이번 전시에서는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한층 자유로워진 표현이 눈길을 끈다. 때수건을 잘게 자르거나 믹서로 갈아 색과 질감을 분류하고, 천의 올이 풀린 흔적과 바느질 자국을 활용해 화면을 구성했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올 풀린 천의 자연스러운 선과 흐름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해 온 회화적 표현의 폭을 넓히기에 매우 적절해 보인다. 인위적으로 형태를 만들기보다 천이 해지고 풀리면서 만들어내는 우연한 흔적을 화면에 끌어들여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회화적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가장 큰 발견은 올 풀린 천을 만난 것"이라며 "그동안 재료를 자르고 붙이고 다듬는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작업이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좀 더 회화적이고 드로잉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설명했다.작품 'Pray', 'Her' 등에서는 보라색과 회색 등 다채로운 색의 조합을 통해 묵직하면서도 섬세한 정서를 드러낸다. 때수건의 색채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인상은 화면에 긴장감과 깊이를 더한다.    또 여러 인물을 한 화면에 배열한 작품 'Face'는 각기 다른 사람의 모습과 감정을 담아낸다. 작가는 특정한 인물을 재현하기보다 관람객이 작품 속 형상에서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여지를 남겼다.  이와 함께 한층 원숙해진 한지 작품도 한 공간을 차지한다. 또 아이패드 드로잉을 바탕으로 직접 자수 작업을 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디지털 드로잉을 손으로 옮겨놓는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수작업의 공력을 들였으며 일상적인 소재를 작가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폭넓은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이번 전시의 또 다른 특징은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 이웃들이 함께했다는 점이다. 집주인과 주변 지인들이 페인팅과 수리, 설치 등을 내 일처럼 거들었고 집에 남아 있던 물건과 옛 사진 등도 소환돼 전시의 일부로 활용됐다. 이웃의 관심과 참여가 더해져 만들어진 생활문화의 현장인 셈이다.박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이 특별한 시설이나 제도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가까운 생활현장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는 "전시가 끝난 뒤에도 이곳에서 서예나 그림 등 각자의 취미와 작업을 나누는 작은 전시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수미 작가는 대구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나는 때수건이다', '삶을 추다' 등 14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한국미술협회와 경북창작미술협회, 프리 콘셉트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전업 작가로서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꾸준히 확장해 왔다.    재료와 표현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온 그의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또 한 번의 더욱 진전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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