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고성이 유난하다. 그 소리에 맞춰 가을이 더욱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이 맘 때쯤이면 할머니 생각이 절절하다. 거친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손자 입에 들어갈 걸 챙겨주시든 애틋한 눈길이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맏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정은 각별했다. 태어나고 한 칠이 지난 후부터 당신의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대구에서 자취를 하던 때는 손자가 굶기라도 할까봐 김천집에서 건너와 함께 생활하셨다. 없는 살림에 그저 조금이라도 더 풍족하게 먹이려고 온 신경을 쓰셨던 할머니는 돌아가시던 그날까지 내 곁에 계셨다. 손자에 대한 염려의 끈을 놓지 않으시면서.  농사일로 힘든 부모님이 잠이라도 푹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속내로 시작된 우리의 한 방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세 살 위인 누이와 나는 매일 할머니의 양팔에 나란히 누워 각자 젖가슴 하나를 차지하고서는 잠이 들 때까지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 이야기, 삼국지에서부터 사명대사이야기와 6.25전쟁 당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모두 군에 보내고 홀로 고모들을 키우며 사셨던 한 서린 이야기까지.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셨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하기야 우리 할머니는 94세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고전들을 읽으셨으니 누구보다 이야기보따리가 풍성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보따리만 푼 것은 아니었다. 더러 더러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성현의 말씀과 속담도 전해 주셨다.  그 중에 "집안에 의논이 하나로 모아지면 살아 있는 부처를 삶아 먹어도 탈이 없다"는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가족 간 화목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하고 그 일을 도우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씀은 효를 실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실제 할머니는 내가 10살 무렵부터 농사일을 마친 아버지를 마중하러 가도록 시키셨다. 힘든 일은 못해도 아버지께서 소를 몰고 지게에 가득 짐을 지고 오시면 소고삐를 잡거나 지게작대기라도 받아들고 오라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해질녘이면 의례히 집밖으로 나가 기다리다가 아버지와 함께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바람에 '오늘은 논을 갈았구나', '오늘은 모내기를 위해 쓰레질을 하셨구나', '보리파종을 위해 겨울거름을 내셨구나'하면서 아버지께서 그날 힘들게 하신 일을 알 수가 있었고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할머니의 가르침이 뼛속 깊이 전해온다. 부모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힘들게 생활하는지를 일상을 통해 살펴보게 한 것은 자식이 가져야할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의 장치였다는 것을, 삼시세끼가 곤궁했던 그 시절을 잘 이겨내게 한 굳건한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삶의 지혜는 이렇듯 가정에서부터 비롯되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핵가족화가 되면서 예전처럼 조부모의 역할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부모 또한 맞벌이가 많아서 자녀에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운 아버지의 현재와 미래 이야기부터 해보면 좋겠다.  "얘야! 아버지의 하루는 이렇단다"를 시작으로 아내와 아이들의 이야기로 무르익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서로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가정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대구보건대학교 소방안전관리과 교수  최 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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