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학의 풍속도가 지난날과는 크게 달라져버린 것 같다. 젊은이들과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교수가 인기를 누리는 반면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는 밀리는 형국이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으로서보다 직업학교처럼 그 성격이 바뀌면서 권위의 상징이었던 노교수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져왔기 때문이다. 연륜과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학문적 깊이나 높이보다는 사회에 진출하면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리(實利)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의 본래적 기능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가치관을 바로 일으켜줄 기초과학(인문학)의 위기는 그야말로 문제다.  우리 사회는 더욱 그렇다. 옛날 마을 공동체엔 동네 어른의 말과 지혜, 불호령이 곧 권위 그 자체였다. 질서와 규범, 올바른 정신의 구현은 그런 어른들이 주도했다. 공동체 속에 어떤 갈등이나 시비가 생길 경우 어른들이 설득력 있는 판단을 내려줬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상담했고, 부도덕한 행위엔 노인들의 충고와 경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동네 어른이 전천후(全天候) 지도자였던 셈이다. 동네 어른은 전통적인 경로효친(敬老孝親)사상과 도덕적 관념의 상징이었으므로 그 권위가 온 마을에 미쳐 질서와 안녕이 지켜지는가 하면, 공동체의 정신을 구현해 외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런 노인의 판단엔 군소리가 있을 수 없었다.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같이 노인들이 받들어졌다. 특히 농경(農耕)사회에선 어른의 권위가 거의 절대적이었다. 농사엔 경험이 중시되고, 노인들은 그런 경험이 많았으므로 효용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 실제적인 능력이 효도(孝道)사상과 맞물리면서 노인 중심의 문화가 형성됐으며,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엔 노인의 영향력이 막강했었다. 국가 차원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연로한 왕과 일흔 살 이상의 문관 중 정2품 이상 고위관료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우대받았다. 예순 살 이상의 노인에게만 응시자격을 주는 기로과라는 과거제도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 같은 국가 정책은 평화로울 땐 충(忠)보다 효(孝)를 중시하며, 효행을 추켜세우던 가치관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노인들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혜와 지식은 밀려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시대역행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허구(虛構)로까지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도시화와 개인주의화로 치닫는 핵가족사회에선 지난날과 같은 권위나 설득력은 박물관의 전시품에 다를 바 없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효도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미덕(美德)이다. 하지만 시대가 크게 바뀌어 이 미덕이 점점 더 희석되고 있는 형편이다. 노인들이 받들어지지 않아 나름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고 있다. 노인 학대 건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체면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노인들을 떠올린다면, 그 정황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식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노인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무관심과 홀대의 정도도 심해지는 세태는 우려된다. 지병을 앓던 노부부가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동반 투신자살한 경우도 있었고, 유산을 일찍 획득하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이 큰 폭으로 늘어나는 데다 수명은 길어지면서도 건강수명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질 수밖에 없다.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며. 건강하지 않은 부모를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그와 비례해서 많아지는 것이 문제다. 이 때문에 효(孝)의 미덕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세태와 맞물려 가공할 반인륜적 사건들이 일어나고,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는 게 아닐까.     효도와 어른 공경심과 가치관 바로 일으키기는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지상의 과제다. 어떤 노인들은 자식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탄하기까지 한다. 낳고 기른 보답이 외로움과 서러움뿐이라든가, 차라리 자식이 없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푸념(절규)하는 노인들도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한가위 연휴 때마다 귀성행렬이 전쟁을 방불케 해 아직은 큰 위안되고 있다고 누군가가 귀띔해주었다. 낙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다. 어른을 받들고 찾는 마음자리가 평소에도 한가위 귀성행렬의 반의반만 되더라도 이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질까. 이 태 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