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자본이고 문화는 미래다" (어느 세미나에서 김남일 경주 부시장의 말씀) 1945년 8월, 광복 후의 미군정하에서 문을 연 '국립경주박물관', 어느 듯 70년의 역사가 흘렀다.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를 대표하는 국립경주박물관은 이 땅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며 이 땅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자랑스런 곳이다 지금 국립경주 박물관에서는 지나간 수많은 박물관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사진으로 보는 전시회' 특집 진열전이 열리고 있다. "장중하면서도 기나긴 여운으로 가슴 밑바닥까지 다가서는 종소리, '소리 하나로 진리에 도달 한다'는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33번째 종소리를 듣고 끝 모를 어둠을 밟으며 다시 박물관 인파 속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벼르고 별렀던 제야의 종소리를 치고 듣는 기회를 얻은 나는 잠시 천상의 세계로 소풍을 다녀 온 느낌이었다" (황병기. 천상에 들리는 듯'에밀레 종소리' 경향신문 1998년12월16일) 이번 사진 전시회에서 유독 필자의 눈을 끈 것은 성덕대왕 신종을 옮기는 몇 커트의 사진이었다. 대왕의 신종이 달려 있던 옛날 박물관의 기와지붕을 헐고, 경주 법원 앞, 팔우정 로타리 일정로 거리를 지나서, 긴 광목을 잡고 긴 강물 같은 행렬을 이루며 대왕의 종, 뒤를 따르며 새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경주 시민들의 모습(1975년 5월)은 지금 봐도 가슴이 뜨거워 온다. "새 박물관이 오는 6월, 개관되면, 이제까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유물 창고에 사장 시켜 놓았던 많은 유물들이 내외 관광객들에게 선 보이게 되고 자랑스러운 신라인의 슬기와 얼을 한눈에 읽을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기쁨니다"(정양모.동아. 1975년3월27일) 또 하나의 인상적인 사진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사회교육의 효시가 된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 개교 사진들이다(1954년 개교) 처음 문을 여는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에 몰려드는 저 코흘리개 꼬마들을 보라! (지금은 이 꼬마들이 자라서 이 땅의 훌륭한 박물관장이 되고 당당한 박물관 학예사들로 자랐다) 경주의 윤경렬 선생과 함께 뜻을 모아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를 시작한 박물관장 진홍섭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본다. "영구히 계속 될 일이니 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도 똑똑히 알려 주자. 모르면 모른다 할지언정 거짓말을 하지 말자. 적어도 교실에서는 깍듯이 공대 하자.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올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학생들에게는 여하한 형태로든지 보수를 바라지 말자. 박물관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점을 인식시키자"(진홍섭.동아. 1955년6월28일) 애틋한 이야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70년 역사의 전시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듯이, 깨어진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생명을 불어 넣은 것 같은 소중한 발자취다. 1957년, 어린이 박물관 개교 3주년 '학생 작품 전시회' 사진을 본다. 그리운 얼굴들이 반갑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고청 윤경렬선생, 일호 김태중 선생, 아, 경주중학교 모자를 쓴 중학생 때의 김윤근 (전 신라 동인회 회장)선생 얼굴도 보인다. 1950년 6월 박물관 사람들이 금관총 금관을 보관했던 '금관고'가 보이는 5백년 고목의 은행나무가 있는, 옛 박물관 뒤뜰에서 직원들이 담소하고 있다. 정겨운 추억 속의 박물관 사진들, 경주의 가을이 장중하면서도 긴 여운으로 다가온다.김 성 춘  시인·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