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하면 충청북도 보은을 생각하지만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에 있는 속리산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선유동계곡과 화양동계곡이 있고, 지금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분비고 있다.  속리산하면 법주사와 문장대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필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면서 정2품 소나무와 복천암, 그리고 신미대사가 더 먼저 떠오르게 되었다.  1992년 유니코드에 적합한 한글코드로서 훈민정음 기반의 정음형(Hangul Jamo) 코드를 연구개발하여 ISO/SC2 국제표준 문자코드소위원회에 제안하여 채택되는 성과를 올리는 과정에서 이러유 사실들에 접하는 기회가 있어 간략하게 소개한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있는 수령 600년의 삿갓 같이 생긴 정2품 소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가 훈민정음과 관련이 있다고 하면 정말 얼토당토 않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1455년 조선 조정은 단종을 폐위하고 1457년에는 기어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왕위 찬탈에 성공한 세조는 계유정난부터 보위에 오를 때까지 많은 사람을 해쳤으니 백성들의 원망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한 신병을 치료하고자 1464년 속리산 법주사를 찾아가는 길에 정2품 소나무가 탄생하게 된다. 이 때 세조가 험한 말티고개를 넘어서 속리산에 간 까닭은 바로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함이다.  세종은 문종에게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존호를 내리라고 유언했다. 여기서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에 버금가는 일은 바로 훈민정음 창제라 할 수 있으며, 세조와 신미대사 간의 연결고리는 불경언해로 본다. 세종 이도는 1443년 12월 30일(세종 25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발표한다. 그리고 1444년 2월 16일(세종 26년)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 외 5인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고금운회(古今韻會)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양대군(晉陽<首陽>大君) 이유, 안평대군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한다. 1446년에 세종대왕의 정비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서거하는데, 왕후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석가모니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이 1447년에 수양대군과 신미대사의 합작품으로 금속활자로 출판된다.  이 때 훈민정음으로 언해된 서적의 8할이 불경임에는 당대 최고의 범어 전문가인 신미대사의 역할이 컷을 것으로 본다. 또한 세종 25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발표하기 5년전인 세종 20년(1438) 명나라 정통 3년 천불사(天佛寺)에서 발간된 석가모니 일대기를 담고 있는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 5권이 1999년에 알려진다. 이 책은 당시 해인사 일타스님이 구입하여 경상대학교 짐계 려증동 교수에게 보내어 진 것이다. 훈민정음은 1438년(세종 20년) 이전에 초안이 만들어졌을 것이며, 변음(어미활용)과 토착(어간)을 다 살피지 못하여 대군들에게 풀어보라고 시켰으나 모두 풀지 못하자 드디어 둘째 딸인 정의공주에게 명을 내렸더니 곧 연구하여 풀어서 바쳤다고 한다. 불자였던 남편 연창위 안맹담은 집안에 불당(추정 천불사)을 짓고서 10여 명의 스님들과 함께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원각선종석보' 5권을 훈민정음으로 언해한 뒤 판각본을 부왕에게 실험 검증한 결과 보고서로 제출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은 성종실록과 죽산안씨세보에 흔적이 남아 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 조정에서 불교의 입지는 좁았을 것이며 스님들의 활동 또한 제약이 많았던 시절이지만 법주사 복천암의 복천보감(福泉寶鑑)과 수암실기(秀巖實記) 등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세종이 신미대사를 총애하고 수양대군이 부왕의 역점 사업을 관장하면서 범어에 능통한 신미대사와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결과에 연유된 일이라고 본다. 변 정 용  동국대 교수·(사)경주지역발전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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