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경주 박물관에서 두 번째 '우리 집 보물전'의 전시를 보았다.'임진왜란과 경주의 의병, 김석견 선생과 사부자'에 관한 소중한 유품 전시회였다. 문옹(文翁) 김석견(1546-1614), 그는 누구인가? 나는 문옹 김석견 선생을 잘 몰랐다. 식견이 좁은 필자로서는 경주에서도 임란 때 수많은 의병활동이 있었고 왜병과 싸운 조상들의 피 맺힌 이야기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경주 의병으로 유명한 김호 장군과 최진립 장군에 얽힌 임란 활약상 정도 밖에 모른다. 역사라고 하면 우리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인간의 총체적 삶을 이해하고 담아내는 데는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의 이해가 더 중요하다. 이번 '우리 집 보물전' 기록 전시회에서 나의 관심을 가장 끈 것은 400여년 전, 임란 시대에 신었던 오래 된 김석견옹의 신발 한 켤레이다,  다 헤진, 파란 만장한 한 인간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어쩌면 경주의 강과 산을 헤메었던 신발 한 켤레, 마을에서 마을로, 고갯길에서 고갯길로, 집에서 집으로 달렸을 저 허름한 신발 한 켤레, 온갖 사선을 다 넘었을, 400여년 전의 조선시대 저 낡은 신발 한 켤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조상의 귀중한 보물로써 나를 감동 시켰다.  나는 가끔 궁금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 그것은 국립 경주 박물관엔, 왜 오래된 우리 조상들의 신발이 보이지 않을까? 그 흔한 신발이 왜 국립박물관에 보이지 않을까? 천년 전의 신라 시대는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그렇다치고, 고려나 조선시대 조상들의 신발마저 왜 보이지 않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우리는 이번 '보물전'에 선을 뵌, 오래 된 볼품없는 이 신발 한 켤레의 무게를 생각해야 한다. 그 유품을 후손에게 전해주기위해 '김해 김씨 문옹 공파' 후손들은 얼마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였을까? 우리는 정성어린 그 후손들의 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조상들의 고귀한 정신을 소중하게 느끼면서, 값진 영욕의 상처까지를 기억 하기위해 노력한 후손들의 정신을 높이 사야 한다. '김석견 옹'은 400여년 전, 경주시 양북면에 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47세에 두 아들과 지역의 청장년 백여 명을 이끌고 전장터에 의병으로 나선다. 처음에는 집안의 제사를 받들고 대를 이을 생각으로 둘째 아들(몽양)은, 집에 남겨 두었으나, 부인 윤씨가 둘째 아들마저 전쟁에 나서도록 독려 한다. 둘째 아들은 내남면 노곡리 곽천 전투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안타깝게도 26세로 전사를 한다. 임란 뒤, 문옹 선생은 '훈련원정' 이란 벼슬에 임명 되었으나 사랑하는 둘째를 잃은 슬픔에 벼슬마저 사양하고 양북면 두산 별장(두산서당)에 기거하면서 농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 69세에 생을 마감 한다.  이번 전시를 보면서 필자는, '문옹 선생'의 애국심과 세 아들의 지극한 효심, 그리고 그의 선비정신에도 감동을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400여년 전 '문옹선생'께서 신었던 허름한 신발 한 켤레에서, 임란의 참혹했던 현장을 다시 돌아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고, 후손들의 조상을 숭배하는 아리따운 그 마음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김 성 춘 시인·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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