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지난해라는 말이 어색하다. 부자든 빈자든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히 주어진다. 우리는 새로운 365일 8,760시간을 저 먼 우주로부터 선물 받았다. 무게도, 형체도, 소리도 없는 이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써야할까.  지난 해 마지막 날, 극도로 상반된 두 개의 현상을 보았다. 이건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산재하는 사회적 메시지다. 밝음과 어둠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 면이 빛에 노출될 때 다른 한 면은 그늘을 받아들인다.  부산에서 일어난 오토바이 교통사고 현장은 안타깝고도 아름다웠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는 타인의 생명을 위해 합심을 한다는 건 이타심(利他心)이다. 이타심이란 나의 직접적 이익을 떠나 타인에게 이득을 주는 일이다. 그들 중에는 허리가 아픈 이도 있었을 테고, 팔이나 다리의 관절이 아픈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시각을 다투는 그 순간 자신들의 질환쯤은 까맣게 잊고 한 생명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치는 사람들.  그 장면을 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시울도 시큰했다. 이상적인 국가, 유토피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개인이 모여 이루는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세상은 혼란을 야기한다. 이타심의 또 다른 심리학 언어는 따뜻한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세상이 각박해진다는 건 감정이입의 현상이 줄어들어 이타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인 동시에 너일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은 잊는다. 누구에게나 어떤 어려움이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닥칠 수 있다.  이타심의 반대말이 이기심이다. 나와 내 가족 이외에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이들이 늘어가는 세상이다. 나와 내 가족들의 행복과 안녕만을 비는 이들이 흔하다. 복은 간청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서 느끼는 행복이다. 주지 않고 오는 것은 없다.  또 하나의 장면은 학생들이 킬킬대며 연로한 교사에게 신체적 접촉으로 조롱하는 장면이었다. 눈을 감고 싶지만 더 크게 뜨고 보았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동물에게도 그러면 학대다. 선생이란 자신의 학식을 베풀어 지식을 깨우쳐주는 이들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학부모들의 항의에 선생님이 응낙하여 처벌을 면했다. 적어도 앞의 장면에서 자동차를 들어 올린 부모들이라면 아이를 저렇게 키우지는 않을 것 같다. 학생도 부모도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사회도 저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늘 인성이 문제다.  나는 학생들을 나무라면서 어른이 보여준 세상의 구조적 문제점을 돌이켜본다. 어른인 선생이 존중받지 못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비인간적인 사회의 밑그림이 있다. 주입식 공부만으로 학교가 입시의 성과에 매달리는 것을 학생들이 모를 리 없다. 자신들의 정신이 불합리한 교육정책의 볼모가 되어 로봇처럼 조종당한다고 느낄 것이다. 청소년이란 어떤 존재인가? 정신과 몸이 다투듯 자라는 최고조의 젊음이다. 청춘의 열혈들이 세계적으로 드문 교육정책과 사회의 요구에 모자라는 잠을 이겨내며 신음하는 것이다.  세상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그 무엇도 하나의 실체만으로 완전무결하지 않다. 세상이 나아지는 것은 개개인의 정직한 가치관이다. 부산의 교통사고 현장이 보여 준 배려의 이타심과 선생을 원숭이 취급하듯 조롱하는 학생들과 그 부모들의 일탈의 이기심. 우리는 두 개의 현상을 반면교사 삼아야한다.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듯 세상도 미래도 전진한다. 양지의 이타심을 향해 조금씩 더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걱정 말아요, 우리"라는 안심을 억지로라도 하고 싶다. 이 화 리 소설가·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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