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면서 카톡으로 연하카드를 받았다. 원색에 가까운 빨강과 파랑의 배경 위에 휘갈겨 쓴 듯한 글씨였지만 퍽이나 눈길을 끌었다. '잘 가라 이 年아! 난 더 좋은 年 만날 거다. 그래봤자 병신년'  쓴 소주라도 앞에 놓고 머리를 주억거리며 그래, 내년에는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자, 하고 조금은 숙연하고 경건한 포즈를 취해야 하는 즈음에, 이 무슨 해괴한 발상인지 평소 유머에 약한 내가 점잖은 사람들 단톡에 보내고서 아차, 싶었다. 너무 가벼웠나? 역시 답글을 단 사람은 두 명 뿐이었다. '푸하하, 안뇽~ 기다려! ㅎㅎㅎ'  그래봤자 병신년이라니, 올해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며 조금 쓸쓸해졌다. 2016년을 예상하면 그렇지 않겠는가. 미국이 금리를 인상했고 그 파도가 한반도에 몰아친다면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산 사람들은 한숨이 깊어질 것이다.  2008년에 심각했던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더 이상 채무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파트를 버리고 소설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조드 일가처럼 어디론가 살 곳을 찾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결혼한 지 2년이 넘은 부부의 말이 생각난다. 아파트가 너무 올라 포기했다고 한다. 장기 대출로 사라고 권유했더니 새댁이 펄쩍 뛰며 말했다. "일이 억을 빌려 아파트를 살 만큼 우린 과감하지 않아요.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구요"     새댁이 짓는 여유로운 미소가 조드 가의 딸 로저샨의 미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저샨의 애칭은 예수의 사랑을 상징하는 샤론의 장미다.  경작지를 잃은 미국 오클라호마의 농민 조드 일가는 낡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비옥한 땅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그러나 그곳은 굶주림과 질병과 착취의 땅이었다. 농장에 열린 포도는 먹지 못하는 분노의 열매일 뿐이었다.  농민들이 파업을 하던 중 인도자인 목사가 몰매를 맞고 죽는다. 분노한 아들 톰이 복수로 살인을 저지른다. 어머니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힘차게 살기를 절규한다. 설상가상 끊임없이 퍼붓는 홍수로 모든 것이 떠내려가고 언덕 위의 헛간으로 비를 피한 딸, 샤론의 장미는 굶어 죽어가는 한 사내를 발견한다. 피로와 굶주림으로 아이를 사산한 그녀는 사내를 살리려고 젖을 물려준다. 자, 어서! 그녀는 입술을 모으고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애착,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스타인 백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굳세게 살아남기를 바라며 그렇게 소설을 끝맺었다.  그들의 삶의 여정이 너무도 비참해서 터질 듯한 분노 때문에 책을 손에서 놓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만 있다면 독자는 어떤 고난도 이겨낼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서유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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