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모든 아기는 천사다. 아기의 울음은 언어 이전의 참말이다. 첫 울음의 어디에도 작위적인 허위는 없다. 태초의 한 생명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상태를 전달하는 것이다. 깊은 어둠에서부터 길고도 긴 길을 어렵사리 헤쳐 나오느라 무척 힘들었다는 걸 알아달라는 말이다. 생명의 실체가 두루 건네는 인사다. 울음 뿐 아니라 눈빛도 살빛도 모두 티 없이 순결해서 보석의 원석처럼 귀중하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도, 풋생명은 다 이러하다.  뼈가 다 자란 어른이 이 말랑말랑한 어린생명에게 기댄다. 바르게 잘 자라 정직한 사람이 되어,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고 타자의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 세상에 보이고 듣는 일들을 학습한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스스로 깨우치기보다 가정과 학교의 교육을 통한 습득을 한다. 어른은 아이에게 가장 기초적인 밑돌이 된다. 인격이 미완인 아이는 이분법의 능력만으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분한다. '그래야지, 참 착하구나, 그래야 한다', '안 돼, 그러지 마라, 그건 나쁜 일이다'  이 쉬운 분류를 어른들은 스스로 저버리면서 다중인격자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세상은 흑백논리의 이분법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벽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사이에는 불가피성이 존재한다. 불가피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당위성은 합리적 객관성을 띠어야 진정한 이치가 된다. 역지사지라는 훌륭한 철학적 사유가 있다. 나를 타자의 위치에 두고 타자의 눈으로 보아야 적확한 판단이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자신에의 성찰이다.  왜 어른을 아이를 가르치고, 자신은 가르치지 않을까.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분마저 흐려질 때 어른은 자기변호에 분주하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인가에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결국'나'를 잃는 것이다. 정신의 실체는 없고 육신의 허울만으로 동식물처럼 살아가는 유기체일 뿐이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상위에 속하는 고등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어른의 특징 중 하나가 화려한 수사로 남에게 훈시하는 일이다. 미숙한 인간일수록 남의 평가를 잘 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평가는 신의 몫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합리적 이치의 논점을 떠나 자신의 말로 감화시키려는 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말만으로 타인을 설득시킬 수 없다. 그래서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이 있다. 말과 합일되는 행동이 그 사람을 증명한다.  '나'라고 지칭하는 '나'를 만드는 건 '나'밖에 없다. 정의로운 사회의 규범, 인간의 기본 도리, 타자에 대한 예의를 지니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학습한다.  말씨는 말의 씨앗이어서 자란다. 주변에 말의 씨가 더러운 사람이 더러 있다. 장년의 나이에도 함부로 뱉는 말씨는 대단한 용기이며 실언이다. 이런 이가 자신의 아이에게 '예의, 그런 거 차리지도 말고 아무한테나 막 대해도 돼. 그렇게 살아' 이렇게 가르칠까?  아니면 타인들이 마땅히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될 만큼 형편없다는 건방진 우월 때문인가? 내가 대접 받고 싶으면 상대를 먼저 대접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된 언행을 고치지 않고, 나는 원래 이러하니 네가 알아서 들으라는 건 양해가 아닌 야만적 협박이다. 건강한 정신에서 건강한 말이 나온다. 말과 행동이 곧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말도 행동도 책임이 따른다. 한 번 뱉으면 영원히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말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자각하는 건 어른이 되었다는 증빙이다. 그래서 어른은 함부로 마구잡이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실언은 곧 인격상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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