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실에는 어느 때보다 환자가 많았다. 한 부인이 푸념을 섞어 속삭이자 누워있던 환자들이 귀를 기울인다. 명절이 싫단다. 삭신이 쑤시도록 일했지만 누구하나 진심으로 장남 며느리의 고충을 위로해주지 않는단다. 제사든, 명절이든, 부모님 병 수발이든,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운명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말을 들으면 억울하단다. 커튼 칸막이 사이로 부인의 깊은 한숨 소리가 새나왔다. 왼쪽에 누워 있던, 친구인 듯한 부인이 말을 보탰다.  그러게, 재산은 똑같이 나누잖아. 조금이라도 유산을 받을 수 있다면 행운이고, 가난한 집의 장남이 문제지. 가난은 대물림도 잘하더구먼. 가난이 가난을 낳고 또 그 가난이 가난을 낳고 말이야. 그래서 변변한 선물 하나 들고 오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아. 진심어린 격려의 말 한마디 듣고 싶을 뿐. 은근히 차남 처지를 부러워하며 말을 흐리자 또 다른 목소리가 대꾸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오라니 가라니 하는 형님 호출에 죄 지은 사람마냥 기가 죽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데요. 호강에 받쳤군. 한 달만이라도 부모 모시고 병원 들락거려 봤는가. 조용히 해달라는 물리치료사의 부탁을 듣고서야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우리나라에서 1% 정도의 가정은 신정을 쇠고 구정에 가족여행을 한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주변에도 그런 가족이 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가 무리를 이루어 여행길을 나서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유쾌하다. 한 부대의 사랑이 여행지 길목을 지나가리라.  자식들이 모이면 몸져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 요리를 하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누구나가 아들이며 사위이고 딸이며 며느리다. 사람들은 명절 증후군을 두려워하며 엄살을 조금 피우면서도, 자신의 집에 모이는 가족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다. 아버지는 고슬고슬한 밥을 좋아하셨지, 어머니는 찰떡을 좋아하셨고, 하며 추억을 빚는다.  우리의 현실이 각박하지만 설날만큼은 넉넉하고 따뜻해진다. 우리는 살아생전에 가족이라는 두리반 앞에 자주 둘러앉아야 한다.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나중에, 나중에, 하며 사랑의 말을 미루진 않았는지, 지나쳐버린 무심함은 없었는지. 사랑의 말을 가르쳐주는 소설 '로드'를 소개한다. 미국의 4대 소설가 중 한 사람인 코맥 매카시는 이 작품으로 2007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도시는 재로 변하고 인간은 식인종이 되어 약탈을 일삼는다. 소년과 아버지는 안전한 곳을 찾아 끝없는 길을 간다. 배고픔과 추위와 공포 속에서 악착스레 살아남지만 결국 아버지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 아빠, 절대 저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냥 함께 데려가 주세요. 난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을 수가 없어. 내가 여기 없어도 너는 나한테 얘기할 수 있고, 나도 너하고 이야기할 거야. 두고 봐. 제가 들을 수 있나요? 그래 들을 수 있지. 연습을 해야 돼. 포기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소년은 숨을 거둔 아버지 몸에 담요를 씌우고 옆에 앉아 오랫동안 울었다. 소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빠하고 매일 이야기 할게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을게요. 소년은 일어서서 몸을 돌려 다시 길을 떠난다. 길에서 만난 한 남자의 아내가 혼자 남은 소년을 안아 준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건네지는 사랑이 소년을 위로한다.  우리 역시 궁극에는 외로운 고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라는 가족이 있어 함께 모여 위로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로드의 소년처럼 어머니에게 말한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도 우리에게 말한다. 내 새끼들 힘들었지. 운전 조심하고 잘들 가거라. 그러고 보니 명절 증후군이란 사랑의 증후군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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