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인 엘리어트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시인은 '황무지'시 첫 구절에서'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가지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라고 1차세계대전후의 황폐한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을 '황무지'로 표현했다.그렇다. 4월은 우리에게도 잔인한 달이다. 교육도 경제도 세월호도 20대 총선도… 그렇다. 온 천지에 신록이 눈부신 아름다운 이 계절에, 나는 왜 어느 시인이 노래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느끼는가. 경주의 폐사지중에 가장 슬픈 분위기의 절은 암곡동의 무장사( 藏寺)이리라. 며칠 전 나는 덕동호를 지나, 왕산 마을을 지나, 내가 좋아하는 암곡동 무장사( 藏寺)지를 찾았다. (암곡 출신의 문우 R형과 함께) 마을 끝 주차장 앞에는 '무장사 미나리 팝니다'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비닐하우스와 미나리꽝, 싱싱한 초록물결이 정답다. 몇 년 전의 무장사 답사 때는 내가 보지 못했던 풍경이다. 나는 문우 R형의 안내로 처음 보는 도자기 옛 가마 터, 기왓골 구경도 한다. 깨진 도자기 파편이 지천으로 흩어져 있다. 목월의 '청노루'시에 나오는 느릅나무 속잎 피는 '느릅나무'도 보고, 계곡물 소리에 귀를 씻으며 야생화와 대화를 나누며 한적한 길을 걷는다. 12개의 개울을 건너뛰며 즐겁게 간다. 아마 암곡동 고선사 주지로 있던 원효스님도 포항 '오어사'에 계시는 혜공 스님께 한 수 배우러 이 암곡동 산길을 걸어갔으리라. 또한 1817년 4월29일 봄날, 32살의 젊은 추사 김정희가 무장사지 훌륭한 비편을 찾기 위해 경주로 와서, 심심산골 이 '무장사'를 찾아서 이 산길을 걸었으리라. 마침내 그 봄날, 추사는 무장사지 풀섶에서 황금같은 비석 파편 두개를 줍는다. 아아, 추사는 스스로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이것은 한편의 기막힌 역사의 드라마가 아닌가. 무장사지! 왜, 신라 사람들은 이 깊고 깊은 산골짜기에 절을 세우려고 했을까? 무장사가 어떤 절인가. 그윽한 골짜기가 너무도 험준하여 마치 산을 깎아 세운 듯 몹시 가파르고 어둡고 깊어 저절로 텅 비고 순박한 마음이 생겨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만한 신령스러운 곳이다 -일연스님·삼국유사 '무장사'를 떠올리면 경주 부윤 홍양호(1724-1802)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홍양호는 서른 일곱 살 되던 1760년(영조 36년),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여 2년간 재임하고 떠난다. 인품이 원만하고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경주 부윤 홍양호의 '무장사 사적비'에 대한 글을 읽는다. '암곡 무장사에 가면 신라 김생(金生)이 쓴 비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장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읍지를 찾아 열람한 뒤, 아전을 시켜 비가 있는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아전이 깊은 산골에 들어가니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곳 노승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무장사의 옛터이고 신라 때 왕이 무기를 이절에 숨겼다 하여 '무장사'라 했으며, 비석은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전이 돌아와서 보고하자, 그는 절터가 있으면 비석은 혹 숲속에 묻혀 있을 수 있다 하고, 재차 아전을 보내어 찾아보게 했다. 며칠이 지난 뒤 아전이 와서 말하기를,"절 뒤에 심하게 마멸된 이상한 돌이 하나 있는데, 이를 세워보니 옛 비석으로 , 그 절반은 부러졌습니다" 라고 했다. 그는 말을 듣고 다시 장인을 보내 깨진 비석의 탁본을 떠 오게 하여 살펴보니 과연 무장사 비석이었다. 신라 때 문장으로 이름을 높인 김육진(金陸珍)이 글씨를 썼는데 , 속설에 '김(金)'자를 보고 김생의 글씨라고 알려진 것은 잘못 된 일이다'-조철제 지음·'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에서 신라 제 39대 소성왕(799-800)과 그의 왕비 '계화부인'의 슬픈 이야기가 담긴 이 곳. 소성왕이 즉위 1년 5개월 만에 죽자. 왕비 '계화부인'이 지아비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아미타전을 지은 슬픔이 서린 이 절. 그래서 '계화부인'의 슬픔이 서려 골짜기가 어둡고 깊은가. 얼굴은 깨졌지만 두 마리의 거북이를 한참 드려다 본다. 나는 쌍거북에게 감정이입을 시켜 본다. 쌍거북 비석을 만 든 이름 모르는 신라 장인 생각도 해본다, 그 장인은 계화부인의 슬픈 마음을 읽었나 보다. 여의주를 입에 문, 왼쪽 거북이의 손(왕의 거북?)이, 오른쪽 거북(계화부인의 거북?)의손 쪽으로 굽어 있다. 애틋한 저 손의 표정! 나는 절터 아래 깊은 계곡 용소(龍沼) 위에 솟은 삼층석탑을 본다. 저 탑은 배의 돛대 같다. 그 아래 용소는 서방정토 극락으로 가는 배! 그렇다면 '반야용선'이 아닐까? 눈부신 봄날, 동행한 문우 R형과 나는 용소를 보며, 나뭇꾼과 선녀 얘기로 한 바탕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