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다. 경주의 들판 어디서나 서 있어도 좋은 오월! 가만히 서서 코로 숨만 쉬어도 좋은 경주, 청신한 신록과 역사의 원형질을 느낄 수 있어 좋은 도시 경주. 계림의 숲과 월성이 보이고 부드러운 여인의 유방 같은 왕릉들이 사는 동부사적지, 허물어진 황룡사 폐사지 앞에 서서 느끼는 천년고도의 봄, 그 비애미는 황홀하다. 경주의 오월은 천년의 향기를 품고 오늘도 말없이 우리 앞에 흐른다. 나는 이 찬란한 계절에 '천관녀(天官女)와 유신'의 비극적 사랑이야기가 숨어 있는 '천관사'를 찾는다. 반월성 옆길을 돌아 월정교를 지나서 '천원마을' 입구에 들어선다.  '천원 1길'은 행정적으로는 경주 '교동'이다. '천원 안길'에는 무슨 문화재인지 지금도 발굴이 한창 진행 중 이다. '천원마을' 경로당을 지나 논밭 길을 조금 걸어가니, 눈앞에 '도당산'이 나타난다. 멀리 선도산도 보인다. 밭둑길 옆으로 맑은 개울물이 소리도 없이 흐르고 돌미나리가 싱싱하다. 가까이 마른 풀더미들이 서걱이는 밭에 무너진 탑재들이 보인다. 폐사지 '천관사터'다. 입구에 '김유신장군과 천관녀도' 안내판이 서 있다. 나는 그림을 곁들인 안내판을 읽는다.  이 절터는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천관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萬明 부인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러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은 잘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말안장도 버린 채 돌아 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 하였다. 천 몇 백년이 흘러도 처절하고 비장한 사랑의 이야기는 가슴 아프다. 소년 화랑 유신의 첫사랑! 매력적인 여자 천관,(과연 그녀의 본명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기생이 아닌 궁궐의 제사를 담당하던 여사제가 아니었을까? 비극의 주인공 천관, 그들은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났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사귀었을까? (아마 오랫동안 사귄 것으로 추정된다. 유신의 애마가 천관의 집을 찾아갈 정도가 됐으니…. 이 장면은 영화로 치면,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만났을 때가 아마도 유신이 화랑이 된 직후가 아니었을까.  한숨을 쉬면서 나누던 청춘 남녀의 풋 사랑, 그 애절한 이야기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당시 두 사람의 비극적 이별 이야기는 서라벌 뭇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기막힌 로맨스였으리라.) 고려시대 이인노의 '파한집'에 천관녀가 지었다는 노래 한수가 나온다는데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세월은 흘러 싸움터에서 40여년을 지낸 백발이 성성한 늙은 장수 김유신이 어느 날, 옛 애인 천관의 집을 찾아 나선다.  천관의 집은 작은 불당(佛堂)이 되어 있다. 용화 도령이 애마의 목을 베고 무정하게 떠난 후, 천관 아가씨는 중이 되어 도령의 무사함만을 빌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유신은 전해 듣는다. 유신은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그 자리에 '천관사'를 짓는다. 참으로 화사한 경주의 봄날이다. 천관사는 그 규모가 큰 절이었나 보다. 큰 탑의 석재 일부가 남아 있는 황량한 절터를 쓸쓸하게 둘러본다. 제38대 원성왕의 꿈에도 나타났다는 그 유명한 '천관사의 우물'터는 어디 인가? 옛 우물터를 찾았지만 마른 풀 섶에 가려 찾지를 못했다. ( 2000년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에서 '천관사지'발굴시 우물터도 발굴됐다고 함)  나는 또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어디쯤에서 술에 취한 화랑 유신이 애마의 목을 치고, 신 바닥에 애마의 피를 묻힌 채, 값 비싼 자신의 말안장도 버린 채 돌아 섰다는 그녀의 집, 과연 천관녀 집의 대문 앞은 어디쯤일까? 궁금하다.  나는 무너진 석탑과 무너진 천관녀의 슬픈 사랑 얘기를 떠 올리며, 왔던 길을 다시 지나 '천원 마을'을 빠져 나온다. 마을 입구 허름한 식당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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