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상처와 분노로 일그러진 마음을 녹이며 망각으로 잊혀 진 나를 깨운다. 흡사 저장된 기억을 되살려 뒤통수를 치는 알파고처럼. 마라톤 경기! 아테네의 병사 필리피데스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40km를 혼신의 힘으로 달려 죽음과 맞바꾼 승전보, 그가 품은 정신은 애국이고 애족이었으며 자유와 진리에 대한 가치 있는 존엄이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의 존엄과 희생이 우리 마음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은 작금의 아류와 비겁, 만용과 허세가 지나치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달 말 통일기원 해변마라톤 대회! 형산강 나루에서 이는 통일의 숨결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바람을 타고 백두산 골짜기 어느 소녀의 가슴에 닿아 모란봉 언덕 연산 홍 꽃빛으로 물들여 지기를, 해와 달의 고장 포항에서 솟아오르는 통일의 기운이 대동강 부벽루의 아침을 적시고 동해로 흘러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물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나는 아침 일찍 BEACH, RUN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서 운동장으로 갔다. 벌, 나비 춤추는 광장에 모인 모두는 꽃이고 봄이었다. 주홍 빛 뜨거운 사랑과 크로버 색 순결한 희망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유쾌한 강남스타일 노래가 신바람 난 치어걸의 율동에 휘감겨 운동장은 온통 행복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요 땅, 출발의 신호와 함께 물오른 4월의 천지를 박차고 나갔다. 싱그러운 초록의 벌판을 뛰고 푸른 파도 넘실되는 해변을 달리는 모두는 기쁨과 행복으로 넘쳐나는 것 같았다. 자폐아의 손을 꼭 잡고 달리며 세상을 살아가는 용기를 더해주는 엄마의 간절함도, 저 멀리 눈물로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며 달리는 탈북자의 고독한 발걸음도, 삶의 벼랑에서 선 낙오자의 입술 꽉 깨문 다짐이며,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이 푸른4월의 하늘아래 펄럭이고 있었다. 더운 심장을 데워 절망과 비애를 삭히며 세상의 고달픔을 봄의 훈풍에 날려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밑이 다 닳아빠진 검정고무신을 신고 들과 산으로 무척이나 쏘다녔지, 푸른 보리밭을 가로질러 무지개가 걸린 동산에 올라 칡꽃을 따서 질겅질겅 씹으며 달리기를 했었지. 우리는 모두가 다 승리자가 되어 풀잎으로 다닥다닥 엮은 꽃다발을 승리의 월계수인양 뒤집어쓰고 무척이나 즐겁고 신이 났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그때는 아무리 달려도 숨도 안차고 가뿐하기만 했는데, 5km 정도 달렸는데 숨이 차다. 땀이 비 오듯 하고 눈이 따갑다. 그러나 향긋한 봄바람이 지친 나의 등을 떠밀어 주고 코스 사이사이 놓인 시원한 생수로 갈증을 축이며 완주했다. 달리면서 본 포항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포항시민의 고향이자 젖줄인 형산강은 오늘따라 더 맑고 푸르게 흐르면서 달리는 우리를 포근히 감싸 안아 주고, 비취빛 영일만의 푸른 바다는 삶에 지친 우리를 반기기라도 한 듯 은빛으로 출렁이며 웃고 있었으며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시민들이 피로에 지쳐가는 우리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포항에 풀코스 마라톤대회가 없다는 것과 벌써 16회를 맞는 통일기원 해변마라톤 대회가 통일에 대한 슬로건이나 간절한 염원이 부족한 것 같았다. 좀 더 알찬 준비와 스토리를 엮어 창조도시 포항에 걸 맞는 대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어머니, 나는 오늘 어머니의 머릿결 같은 봄 길을 발이 부러 터지도록 달려습니다. 봄의 새벽길 홀로 밝히며 걸어온 길, 험하고 외로운 그 길을 헤치고 온 그 길이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이고 형주(사형장의 의자)를 지고 가는 길이기에 나는 눈물의 작은 새되어 날아갑니다. 그리운 당신이 있는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