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古事)가 새삼 떠오른다. 약속을 어기고도 사정이 달라져 그랬으니 이해해 달라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없지 않다기보다 드물지 않게 그런 사람들과도 만나야 한다.  사전에는 '약속'이 '어떤 일에 대해 어떻게 하기로 미리 정해 놓고 서로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미리 정한 일을 서로 어기지 않는 것이 약속의 의미이자 저버리지 말아야 할 미덕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을 다른 사정으로 쉽게 저버린다면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뒤에 만난 상대가 변명을 늘어놓고 이내 태연해지는 경우를 보면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중국 노나라 때의 미생(尾生)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신의를 이야기할 때 인유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약속을 지키려다 목숨까지 잃은 사람이다. 다리 아래서 애인과 만나기로 약속한 그는 홍수 때문에 갑자기 물이 크게 불어나 다리기둥을 붙들고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애인을 기다리던 그는 급기야 물살에 휩쓸려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이 고사는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급류가 휩쓰는 다리 아래서 약속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잃는다는 건 미련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그런 그를 약속의 화신처럼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에도 소진(蘇秦)은 미생을 '신의가 두터운 사나이의 본보기'로 봤지만, 장자(莊子)는 '쓸데없는 명목에 사로잡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른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한다.  아무튼 '미생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사람들은 약속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감이 없지 않다. 심지어 약속을 저버렸다는 사실 자체마저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모르쇠'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건 난처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해지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같이 시를 사람들에게서도 불신감이나 배신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소신이나 문학적 지향점까지도 시대상황에 따라 바꾸는 사람들이 출세의 길을 걷는 걸 보면 '변해야 산다'는 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실감나기도 했다. 약속이나 소신을 언제든지 바꾸고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자신이 바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그저 바라봐야만 하는 마음은 무겁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은 그 '대표 선수' 격이다. 번드르르한 '약속의 성찬'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시침을 떼는 경우를 자주 보지 않았던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또 바꾸는 정치인들에게는 미생이 골치 아픈 인물 아니면, 바보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줄 알면서도 민심을 사기 위해 공약(公約) 아닌 공약(空約)들을 남발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에 사람들은 '빈 약속'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따져 보지도 않고 자기 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져 버리기도 했다.  우리의 정치 풍토는 정책 대결보다는 지방색 위주의 패거리 짓기, 지역이기주의나 집권 야욕이 애국심보다 앞서 온 게 사실이라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공약(公約)은 정치적 목적만 이뤄지면 곧바로 곧 터져 버리는 풍선이나 물거품처럼 공약(空約)이 돼버리곤 했다.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 세태의 극단적인 모습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 같아 우울해진다. 영남권 신공항 문제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약속을 유보한 국립한국문학관 입지 선정 문제도 마찬가지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지역이기주의도 문제지만 정치논리는 더 큰 문제다. 지역이기주의는 생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해가 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약속(공약)은 지키는 게 당연하다는 점에서 정치논리는 고질적인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지역 간의 갈등 때문에 난처하고, 정치적 계산 때문에 국가대계를 왜곡하거나 미뤄 버린 게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미봉책은 불신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킬 게 뻔한 일이지 않은가.  미생과 같은 '위인'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바보'로만 보이지 않는 사회, 국가대계에 대한 소신과 믿음을 최우선으로 어떤 난관에도 밀고 나가는 정치지도자들이 기다려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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