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익(문학평론가·동리목월문학관장)필자는  이중섭 화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김춘수 시인의 연작시  ‘이중섭’ 을 통해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다.-글 싣는 순서 ①시와 회화의 만남 ②서귀포의 바람과 그리움 ③바닷가 아이들과 달과 까마귀 ④충무시 동호동과 대구 동성로의 꽃가게 ⑤아내의 가장 더운 곳  이중섭(李仲燮(1916-1956) 화가(畵家)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제주도통영·부산 등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다. 또한 중앙과 지방의 여러 언론기관이 특집으로 다룬 그의 생애와 예술은 화가 이중섭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겪던 해방기, 6·25남북전쟁의 혼란 시기에 불우한 생활을 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마흔 한 살로 일생을 마쳤지만, 서귀포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해마다 ‘이중섭 축제‘가 열릴 정도로 제주도민들과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그림은 빈센트 반 고호에 비교되어, 요즈음 한 점에 일억 원 이상으로 팔려 가짜 작품들까지 등장 한다. 이중섭 그림의 기반은 사랑과 그리움과 순수성이다. 일본 유학시절 너무나 사랑했던마사꼬와 결혼하고,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李南德)으로 바꾸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원산에서 남한으로 피난했다. 전쟁을 피해 옮겨 다닌 피난생활은 그를 떠돌이 가난뱅이의 신세로 만든 것이다.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는 항상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부산․통영․대구․서귀포 등을 전전하면서 아내와 다시 만나기를 애틋하게 기다리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기만 했다. 그들은 전시회에서 팔린 그림을 은박지에 그렸다고 그림 값을 주지 않고, 통속적이라는 말로 더할 수 없는 인격모독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그 작품을 몰래 빼돌려 몇 배의 이득을 챙겼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해 이중섭은 가난과 회한 속에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그는 종이가 없어서 담뱃갑 속껍질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우직하게 살아가는 소와 천진스런 아이들, 달과 까마귀, 바닷게 등을 그려서 그의 인간적 고뇌와 아픈 상처를 예술에서 찾으려고 했다. 아내가 있는 일본과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우리나라 제일 남쪽 서귀포로 이주했다.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람에게 아내와 아이들의 소식을 물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매우 시(詩)적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그의 그림을 종종 시의 소재로 삼았다. 시인과 화가는 시대와 장르를 초월해서 진지한 미(美)를 발굴하려고 한다. 그러한 미의 발굴 작업은 예술의 신비성을 창조한다. 이중섭과 김춘수는 이러한 예술 원리를 자기 예술에 담아 성공시킨 대표적인 화가요 시인이다. 이 두 예술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일반적인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사물의 내밀한 뜻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예술의 출발을 시작한다. 특이한 소재 선택과 새로운 실험적 표현을 시도하여 미적인 진실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두 예술가는 동질성을 지닌다. 이렇게 해서 이중섭의 생활과 그림은 김춘수의 시로 형상화된다. 김춘수(金春洙) 시인의 연작시 ‘이중섭’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김춘수의 시작(詩作)생활 중에서 어느 작품보다도 그의 예술적 의도와 표현기법의 특성을 가장 선명히 드러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작시 ‘이중섭’은 1973년에서 75년까지 15회 정도 여러 문학잡지에 발표되어 독자들의 관심을 끈 작품이다. 시‘이중섭’은 시와 회화의 만남을 통해 예술적 아름다움을 새롭게 전개한다. 이 글은 필자의 문학평론집에 수록한 ‘시와 회화의 만남’을 바탕으로 이중섭의탄생 백주년을 기리는 뜻에서 수정 작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