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나 도시 그리고 우리나라의 수도 남쪽에 위치한 산을 통칭 대명사적인 성격으로 부르는 이름이 '남산(南山)'이다. 그러하기에 남산은 그 나라의 흥망을 함께한 역사의 산이다. 서울남산이 예전에는 '목멱산', '종남산', '인경산' 등으로 불렸으나, 주로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렀듯이 신라의 수도 경주남산 역시도 '금오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주남산은 신라의 건국 이전 육촌시대부터 나라사람들이 신령한 장소로 여겨,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고자 할 때에는 대신들이 남산에 모여 의논하였다. 박혁거세의 탄강지인 나정(蘿井)에서 시작하여 신라 멸망의 비운이 서린 포석정이 남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신라의 시작과 종말을 함께한 신라의 산으로 우리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경주남산의 성격으로 첫째 신라인들에게 신성하고 성스러운 산이자 숭배의 대상이었고 토속신앙을 행하였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둘째, 남산은 신라의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기지로 치열한 삼국 전쟁기에는 신라의 왕경을 보호하기위해 남산에는 여러개의 산성을 축조하였다. 삼국유사에 문무왕 때 '남산신성 안에 장창(長倉)을 설치하여 쌀과 병기를 저장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고 현재에도 초석과 석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셋째, 남산은 하나의 거대한 불교사원이었다. 신라의 땅이 '불국토' 라고 여겼던 신라인들은 남산에 부처의 진신(眞身)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을 하여 수많은 석탑과 불상을 만들며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다. 당나라의 고운(顧雲)이 신라의 최치원에게 준 시(詩)에 '듣자니 바다위엔 금자라 세 마리가 있고 / 금자라의 머리는 높은 산을 이고 있다 / 산 위에는 보배로 장식한 궁궐과 황금건물들 / 산 밑에는 천리만리 드넓은 파도 / 그 곁에 한 점 푸른 계림이 있어 / 금오산이 수재를 품어 빼어난 인물을 낳았네' 라고 하였다. 고운은 남산의 다른 이름인 금오산을, 바다위의 봉래산을 받치고 있다는 전설상의 금오(金鰲, 금자라)를 빗댄 것이다. 경주남산을 선도산 정상에서나 낭산 서록에서 또는 항공사진으로 보면 산의 형상은 머리를 북쪽으로 둔 자라(鰲)의 모습을 하고 있고, 자라의 머리가 되는 부분이 남산의 북쪽 끝자락 '도당산'이다. 현재 자라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는 산업도로에 의하여 경주남산이 단절되어 머리와 몸체가 두 동강이 난 자라의 형상으로 보여 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다행이 2010년 경주시장에 최양식 시장이 당선 되면서 경주문화인들의 염원으로 경주남산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굽고 휘어져 위험한 도로를 완만한 직선의 터널로 대체하고 도로를 원상으로 복원하고자 계획한 이래 2016년 현재 복원사업이 완료단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이 복원사업은 경주경마장건설 무효와 경부고속철도 경주도심통과 노선수정과 더불어 가장 큰 문화재보호·복원사업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경주남산의 복원사업은 단순히 역사유적지구 남산의 경관정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도시 복업사업에 있어 하나의 큰 획이 될 것이다. 경주는 경주시장님과 경주시민들만의 도시가 아니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역사도시이고, 세계인들이 보호하고자 하는 세계의 역사도시이기에 역사도시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들과 국내외 관련기관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문화융성의 시대에 철저한 고증과 협력을 얻어 역사도시 복원사업을 이루어 낸다면 우리는 분명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선조로 기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