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으로 숨이 막힐 정도인데,최근 청와대 인근에 한복에 갓을 쓴 노인 수백 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다름 아닌 정부가 경북 성주에 '사드배치'를 하자,이에 반발해 상경한 이 지역 유림(儒林)단체 회원들이었다. 시골 노인들의 '서울 나들이'에 한복에다 갓까지 쓴 것을 보면 '뭔 큰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장(正裝) 다시말해 의관(衣冠)을 정제했다는 것이다. 혹서기에 노인들이 의관 차림을 한 것은 '사드 철회' 상소문(上疏文)을 읽기위한 격식이며, 대통령에 대한 예(禮)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이채롭고,재미있는 풍경으로 비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전통 소통(疏通)구조를 볼 수 있는 문화체험 현장이었을 것이다. 상소(上疏)는 중국 주(奏) 나라 이후 부터 문무 백관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운영된 중요한 언로(言路)이자 민원이다. 그러나 상소는 나름대로 엄격한 규칙과 절차가 있었다. 익명서는 접수하지 않았으며 왕의 행차에 함부로 뛰어들어 직접 말이나 글로 상언(上言)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조선시대 상소는 승정원을 경유하여 왕에게 전달되고, 왕의 비답(批答)도 승정원을 통해 하달되었다. 승정원에서는 먼저 규격, 문장의 법식, 오자, 성명 오기 등을 심사했다. 서식과 규격, 전달 방식, 처리 방식도 상소자의 수준과 상소의 종류에 따라 차별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왕조시대 상소문은 군왕에 대한 견제나 정책 비판, 수정을 요구하는 등 '항의성'이 짙다. 그리고 상소문 최종 채택여부는 군왕의 손에 있었다. 지난 역사를 볼 때 신하들이 상소를 제기할 경우 왕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자칫 왕이 판단을 잘못해 상소를 시행했을 때 국운의 명암(明暗)이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는 상소를 수용보다 거의 정보용으로 관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소문은 그 당시 상황과 정치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상소문' 파동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조선시대 세종과 집현전 학자간의 훈민정음 창제 논쟁이다. 세종이 정인지,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와 함께 노력한 끝에 28자의 표음문자로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했다. 이를 두고 집현전 최고책임자인 부제학 최만리 등은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라며 세종의 훈민정음 실행 부당성과 취소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또"어찌,옛날부터 쓰는 폐해없는 글자를 고쳐 따로 낮고, 천(賤)하고,속된 말로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고 쓰겠습니까?"며 군주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에 세종은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아는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며 일갈 했다. 훈민정음 충돌 속에 군신(君臣)간의 '힘겨루기'를 읽을 수 있다. 세종이 신하 즉 관료사회의 반발을 무릅쓰고 정책(훈민정음)을 추진한 것은 '백성(百姓)'을 위함이었다. 그러나 최만리 등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대부들의 의사를 '상소문'으로 대변(代辯)했지만, 세종은 이를 물리쳤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세종이 최만리의 상소문을 받아드렸다면, 훈민정음은 집현전 서재에 파묻혀 햇빛보지 못한 한낱 종이책에 불가했을 것이다. 고운(孤雲) 최치원의 '상소문'은 최만리와는 질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학자인 '고운'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당시 지방호족의 발호와 진골(眞骨)의 부패를 막기위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올렸다. 주요내용은 과거제 실시와 골품제 사회의 모순 등을 건의했지만, 기득권 유지에 눈이 어두운 진골세력들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 상소를 쓰기위해 그는 현재 경주시 인왕동 소재 상서장(上書莊)에서 밤 낮을 가리지 않고 피를 토하면서 글을 썼을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빈곤노인기초연금보장연대가 지난 2015년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밝힌 '기초연금 도끼 상소'에 "전하께서 2012년 대선에서 모든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드리겠다고 만천하에 공약하셨다. 신뢰를 신조로 삼는 전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많은 늙은이들이 '전하'께 투표했다…" 그리고 이번 성주 유림은 "國家安保도 중요하지만 國民의 犧牲을 强要하면서 까지 一方的인 決定은 도저히 默過할 없습니다…(중략). 尊敬하는 大統領님 行政節次의 하자가 있고 郡民 絶對 다수가 反對하는 現在의 位置를 撤回하여 주실 것을 우리 儒林團體 會員一同은 간곡히 엎드려 呼訴하는 바입니다"라는 상소를 했다. 현재도 상소와 유사한 정부 기능으로 신문고,국가권익위 등이 운영되고 있고,더욱 센 것은 SNS도 큰 몫을 하고 있다.미국 백악관 앞은 연중 시위장이다. 어찌보면 우리는 주장이 난무하는 시대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상소는 언로의 한 방편이다. 경우에 따라 특정집단과 지역의 이익, 국가를 위한 호소 등 주제는 다양하다. 세종의 판단으로 우리가 한글이란 세계 최고 글자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성여왕의 결정은 신라를 '패망'으로 모는 길을 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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