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방송된 드라마 '다자이먼(大宅門)'은 1912년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의 중국사회를 그린 시대극으로 당시 CCTV 최고 시청률 상을 수상하였다. 극중 주인공 백경기(白景琦)는 뛰어난 상인으로 바로 거상(巨商) 백규(白圭)의 후손(?)이라고 한다.  백규는 사 마천과 반고(班固) 부터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그를 '중국 상인들의 개조(開祖)(盖天下言治生祖白圭)'로 높은 경지에 이른 인물(高人)이라 평하였다. 반고는 한서(漢書)에서 '공·상업 발전의 비조(天下言治生祖)'라 하였다. 백규를 비즈니스계의 시조이자 고수로 인정한 것이다. 백규는 전국(戰國)초기 상업보다는 치수(治水)로 먼저 이름을 떨쳤다. 그가 위(魏)나라 승상시절, 수십만 마리의 개미 때문에 부식된 황하(黃河)의 둑에서 개미굴을 일일이 찾아 막아서 당시 수도 대량(大梁)을 황하의 홍수로부터 지켜냈다고 한다. 백규는 종횡가(縱橫家) 귀곡자(鬼谷子)의 제자인데, 귀곡자는 제자의 상업적 재능을 발견하고 '금서(金書)'와 '치부지계(治富之計)'를 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의 비즈니스는 마치 '신의 보살핌'이 있는 듯 승승장구하였다고. 훗날 백규는 송진종(宋眞宗)에 의해 '상성(商聖)'에 추존됐으며, 후세인들로부터 '상조(商祖)'와 '재신(財新)'으로, 상도(商道)와 상덕(商德)을 중시하는 상가의 표상(表象)으로 존경 받고 있다.  사실상 백규의 활약은 난세인 전국시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시기는 부국강병과 전쟁 등의 요인으로 생산력이 급증하였고 사회경제제도의 개혁과 함께 구매력과 소비력도 증대되었다. 비약적인 상업 발전으로 당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그의 고향 뤄양(洛陽)에는 대규모 상방(商邦)들이 형성되었고 거상대고(巨商大賈)들이 출현하였다. 백규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훗날 백규는 '범려'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스스로가 '인술(仁術)'이라 정의한 '인기아취(人棄我取), 인취아여(人取我與)'의 경영전략과 매매원칙으로 '거만(巨萬)의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즉 '다른 사람이 모두 팔 때 나는 그것을 사들이고, 다른 사람이 모두 사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내어준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100배의 이윤도 남길 수 있는 보석과 옥, 그리고 소금·광철 등의 거래를 마다하고 식량, 면화 등 박리(薄利)의 농수산물 장사를 하면서 백성과 나라를 마음에 담았다. 성고(誠賈)로 존중받는 까닭이다.  백규는 자신만의 비즈니스경영 이론체계를 세운 최고의 경제이론가로서 '현대인이 추구해야 하는 매우 수준 높은 융·복합형의 CEO'라고 평가된다. 그는 농학, 천문학, 경제학, 병법 모두에 능통하였으며, 병법은 치국과 상업에 접목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바로 다른 거상들과 차별화 되는 일면임과 동시에 또한 특히 경영자의 자질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CEO가 반드시 갖추어야할 자질과 능력으로 '지(智)·용(勇)·인(仁)·강(强)'의 네 가지 덕목을 제시하였다.  CEO는'시장의 변화와 동향을 민첩하게 파악하고 판단하여 임기응변의 재능을 발휘하여 상응하는 계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하며(智), 또한 상황 판단이 되면 실기하지 않고 과감하고 용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며(勇), 매매에서는 인애(仁愛)의 마음으로 인술(仁術)을 실천하고 (仁), 마지막으로 이미 결정한 경영정책과 원칙을 견강(堅强)한 의지와 인내로 지켜낼 수 있는 강인함(强)'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백규는 인(仁)의 실천으로 늘 검소하였으며 비즈니스 협력자들인 고용인들과도 소통하며 동고동락하였다.  전통과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혼혈인 신(新)중국, 신(新)중국인은 오늘날 백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긴장감이 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단단히 무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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