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산(昌山) 김정기 박사님과의 인연은 필자가 고고학(考古學)의 길로 첫발을 디딘 30년 전, 현재는 역사학교수가 된 둘째 아들 김병곤 친구와 함께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하면서였다. 당시 고적발굴조사단(古蹟發掘調査團)의 가장 높은 책임자로써, 한국고고학을 개척한 선학으로써 가장 존경받는 분이셨다. 다가오는 8월 26일이 돌아가신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고고학의 대부, 창산(昌山)은 1930년 경남 창영 영산면 서리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일본 시즈오까 현립 가깨가와 중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3학년 때 광복(光復)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창영 공립중학교에 전학한 후 마산 공립중학교에서 6학년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59년 귀국하기 전까지 일본 메이지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 건축사연구실에서 공부하던 중 국립중앙박물관 김재원 관장의 초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을 시작으로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주요 발굴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1969년부터는 문화재연구소 소장으로 20여 년간 재직하면서 불국사, 천마총, 안압지, 황룡사지, 감은사지, 미륵사지 등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문화유적들의 발굴을 주관하여 한국고고학의 초석과 부흥을 함께 이끌어 오셨던 분이다. 주변의 선학들이 김정기 박사를 평가할 때 '사람이란 학문도 좋지만 우선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김박사는 이러한 점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다. 선학들을 모시는 예의와 도리, 후학들을 대하는 인간미와 누구에게나 예의바른 칭송 받는 사람' 으로 평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깊이와 그 업적은 국내외에 잘 알려져 있다. 그 중 하나의 예를 든다면 '천마총(天馬塚)'을 발굴한 이후에 천마총을 복원하여 내부를 공개전시 한 일이다. 천마총은 1973년 발굴조사에서 다량의 부장품이 수습되었는데, 그 가운데 '말다래'에 하늘을 나는 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확인되어 '천마총'이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 '말다래'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늘어 뜨려 놓은 가리개를 말한다. 그러나 근년에는 '천마도(天馬圖)' 라고 이름 된 말다래는 천마가 아닌 동양의 고전 및 고대미술작품 등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기린'의 모습이라고 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언젠가 신문의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천마도가 발견됐을 땐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고 했다. '손대는 순간 가루가 될지도 모를 그 천마도를 내가 무덤 바깥으로 들어냈다. 책임져야 할 어려운 일은 직접 하는 게 지휘자의 의무다.' 라는 말에서 우리는 현장고고학의 대부임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김정기 박사는 천마총을 발굴조사 한 후 일반 관람객들이 내부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을 볼 수 있도록 전시관을 만들었다. 특히 고분 중심부의 목곽은 썩어진 부분을 재생하고 무너졌던 돌무더기를 다시 쌓아올려 유리벽으로 무덤의 내부 구조와 부장품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출토된 주요 유물들은 실물크기로 복제하여 전시 한 후 관람객들이 쉽게 감상 할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70년대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현장 전시관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천마총은 현재 전국에 걸쳐 만들어져 있거나 만들어 지고 있는 고분박물관이나 고분전시관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천마총의 내부공간은 작지만 그 속에는 신라왕족들의 화려하고 다양한 유물들을 직접 볼 수 있어 신라인들의 공예기술과 고분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는 중요한 전시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묵묵하게 주도한 사람이 바로 창산 김정기 박사님이다. 문화의 시대에 '문화창조(文化創造)'란 이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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