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KBS에서 6·25전쟁 특집으로 방영된 '장군(將軍)과 아들 한국전쟁의 기억'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미국이란 나라가 왜 위대한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280만 명이나 되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지구 반대편의 낯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원해 6·25전쟁에 참전한 일도 놀랍지만 142명이나 되는 장군의 '아들'들이 그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웠다. 아들의 참전(參戰)을 허락했던 아버지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장군들로 육군 사관학교를 설립해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제임스 밴 플리트',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끈 '월튼 해리스 워크', 2차 세계대전의 전차 영웅 '조지 패튼' 심지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34대 미국 대통령까지 있다. 당시, 이북지역으로 전투기를 몰고 임무를 나섰던 아들이 실종되자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된다'며 아들의 실종 수색을 중단 시켰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일화는 군인의 명예와 사회적 책임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 평론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이 2000년간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철학이라며 '로마인 이야기'에서 밝히고 있다. 정치학자 마이클 샌덜은 2010년도에 발간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공동체 의식이 높고 전체의 이익을 위해 미덕을 증진'하는 것이야 말로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이라며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삼국시대를 돌이켜 보더라도 실제로 힘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상대적으로 강성한 고구려와 백제를 제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화랑도(花郞徒)의 사회적 책임에서 찾곤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신분의 구분에 따라 지배되던 과거시대는 물론 평등과 독립이 보장된 오늘날의 시민사회를 관통하며 시대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사회 구성원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오죽했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탱해온 힘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아닌 기부(寄附)다' 라는 말이 있을까? 그 정도로 미국인들은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회로부터 얻은 '부와 명예'를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 것을 당연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잘못된 특권의식으로 일탈행위를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다. 고위공직자의 횡령과 배임, 부적절한 언어사용, 대기업 일가의 비자금 형성과 '갑'질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 고위 공직자의 병역기피 사례는 인사청문회의 단골 메뉴로 회자되고 '금 수저' 논란과 함께 사회 통합을 저해하곤 한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과 중공군이 맺은 정전 협정은 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은 동해안 미사일 발사, 5차 핵 실험 준비 등 과거의 도발 수준을 넘어서는 군사적 행동으로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마저 위협하고 있다. 국민들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굳건한 국가안보 태세 확립이 그 어느 시기보다 절실하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발현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힘은 크다. 국민의 통합을 이끌어 외세로부터 주권과 영토를 지켜낼 수 있는 튼튼한 성벽 구실을 한다. 고위공직자, 기업가, 명망가 등 사회지도층이 앞장서 주춧돌 역할을 하고 놓인 주춧돌 위에 저마다 주어진 돌을 쌓을 때 어찌 성벽이 견고하지 않을까? 정전(停戰)이후 66년의 시간이 흘렀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크지만 오늘날의 번영된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기 까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희생의 댓가로 지켜낸 대한민국이기에 온전히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일에는 너와 나를 구분 지울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입각해 병역의무 이행 등 사회적 책무를 다할 때 국가 안보는 유지되고 문화와 경제는 크게 융성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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