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우면서도 가장 다양한 음성을 표기할 수 있는 발음기호 체계인 한글조차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자(文盲者)'가 많았다. 당시에는 무학(無學)과 유학(有學)을 단지 문맹(文盲)과 비문맹(非文盲)으로 구분하였지만, 해방 이후 발생된 높은 교육열이 이제 세계에서 가장 대학교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고학력자이고 보니, 고학력자에 대한 희소가치가 완전히 사라지고, 요즘은 최소한 박사학위 하나 정도는 가져야 그나마 유학자(有學者)로서 행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따라서 나는 상대적으로 희소가치가 있는 '무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며, 무학자의 입장에서 학자님들에게도 할 얘기기 많아진다. 박사(博士)란 당연히 특정 분야의 학문에 연구가 깊고,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주어지는 '학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뚜렷한 연구 성과나 업적도 없고, 해당분야에 해박한 지식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혹시 학위를 취득하였다면, 그 학위를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박사다운 지식을 쌓기 위한 공부가 사후에라도 이어져야 한다. 또 최고 학위 소지자다운 기품과 인격도 함께 지닐 수 있도록 자기수양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상품을 고를 때 포장지만 보고 상품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물론 포장지가 내용물을 더 돋보이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고급 포장지에 고급상품이라면 모를까, 화려한 포장지 속의 내용물이 형편없다면 이는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이다. 또 허위 성능표시를 한 상품은 과대광고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숫제 엉터리 상품이 포장되어 있다면 이는 사기행위로 처벌까지 받아 마땅할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시중 난전에서 파는 상품도 아닌 사람의 품격과 학식의 정도를 규정하는 학위를 남발하거나, 또 그런 학위를 취득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법과 규정은 사회적 약속이다. 개인과 개인의 약속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공공의 약속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기에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들이며 또 엄정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근래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들이 경영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의 지식 서비스 업종인 학교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원리를 비켜가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공급 과잉은 학(學)의 질을 떨어뜨리고, 질 낮은 인재를 양산하는 학교는 다시 수요자의 외면을 받게 됨으로 학교 경영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경영이 어려운 학교 교육의 질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나라의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하는 우리 교육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학교가 바로 서야 하고, 학교가 바로 서려면 선생님들의 질이 우선 높아져야 한다. 선생(先生)은 바로 학(學)의 주체이며, 선생이 거기 있기에 학생들이 학교로 간다. 제아무리 훌륭한 건물을 지어 놓아도 거기에 좋은 선생이 없다면, 학생들이 등교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며, 고객이 없는 학교에서 졸업장이나 학위 장사인들 될 리가 없다. 나는 평생에 교단에 한번 서 본적이 없는 비학자(非學者)이긴 하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안다. 기술이나 지식을 주입하는 것만이 교육은 아닐 것이며, 참교육이란 지식은 물론 지성과 인격의 전수를 함께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학위 이전에 자기성찰을 통해 스스로 자신이 교육자로서의 지식과 남을 가르칠만한 소양을 갖추었는가를 자문해 볼 일이다. 선생의 본분(本分)은 오로지 학문을 연구 발전시키고 후학(後學)을 양성하는데 있을 것임에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어떤 이권이나 권력의 언저리를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모습들은 시정잡배(市井雜輩)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고, 이런 사람들이 교단에서 하루빨리 내려와야 우리 교육도 제자리를 찾을 것이며, 또한 나라가 바로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