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공(子貢)'은 일찍이 공자(孔子) 문하에 들어가기 전부터 뛰어난 '상인'이었으며, 그의 재물은 범려의 도주지부(陶朱之富)에 버금갔다고 한다. 그는 25세 즈음 공자 문하에 들어간 후 공자의 '맞춤 가르침'과 '다학심사(多學深思)'의 각고의 노력으로 보통의 상인에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유자(儒子)로 유상(儒商)으로 거듭 탄생하였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자공을 유상의 효시(嚆矢)로 평하였다. 이는 아마도 공자 사후 공자의 제자 중 유일하게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가의 이론을 몸소 실천한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세인들 또한 그를 전형적인 유상의 원형으로서 21세기 글로벌비즈니스맨의 롤모델(role model)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공이 처음부터 유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상유(商儒)'에서 '유상(儒商)'으로 발전한 CEO였다. 원래 '유상'이라 함은 학문·문화계에 종사하던 사람이 본업을 접고 장사 길로 들어선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안휘성(安徽省)의 휘상(徽商)이 유상으로 존경받았다. 현대 중국어로는 '샤하이(下海)'라고 한다. 그에 반해 '상유'는 본업인 상업에 종사하면서 학문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배우고 노력하는 기업가를 존경하는 표현이다. 자공은 바로 '상유'에서 출발하여 유가에서 상인의 자질로 강조하는'인(仁), 지(智), 용(勇)'의 덕목을 모두 구비한 '유상'으로 변모하여 유상정신을 실천한 상인이었던 것이다. 자공은 특히 총명하여 그의 '지(智)'적 내공은 공자가 "더불어 '시(詩)'를 논할 만하다"라고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달변은 특히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공자는 그의 철환천하(轍環天下)의 핵심적 재정지원자였던 제자 자공과 그의 유상(儒商)정신을 어떻게 보았을까· 공자는 '호련(瑚璉)'과 '통달(通達)' 이 네 글자로 자공에 대한 평을 대신했다. 먼저 '호련((瑚璉)'은 중국 고대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는 정결하고 장엄한 옥기(玉器)의 일종으로 '고(高·귀(貴)·청(淸)'의 상징이다. 자공은 바로 '고(高·귀(貴)·청(淸)'의 품격을 갖춘 상인이라는 것이다. '옥(玉)'은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귀한 보석으로서 황제의 인장이 '옥새(玉璽)'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공자가 보는 자공은 장사를 하면서도 학습(儒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치 외교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高), 노(魯)나라에 매번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타파할 인물로 집정자 중 제일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다(貴). 또한 장사로 축적한 부를 백성들에게 베풀고 스승의 주유천하를 지원하는 등'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oge)'을 실천한 '청(淸)'의 인격을 가진 인물로 평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자공을 또한 '달(達)'인(人)으로 평하였다. 즉 '통달((通達)'이 그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달인((達人)'은 '천성이 정직하여 왜곡하는 마음이 없이 권력과 술수를 부리지 않고, 강개(慷慨)하고 의로우며, 지혜와 안목과 선견지명이 있고, 또 늘 낮은 자세로 임하며 오만함이 없이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정당하고 지혜롭게 치부(致富)하였으며, 재물은 또한 노나라의 외교를 위해서, 스승 공자와 그의 사단을 위해서,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다른 제후국에 처첩으로 팔려간 노나라 여인네를 구해내는 경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개혁개방이후 모든 중국인들이 상인으로 변신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모범적인 상인 모델이 필요했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이 바로 '유상'이었다.
문 정 혜 대구가톨릭대 글로벌비즈니스 대학 아시아학부 중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