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 최고 논쟁거리라면 '이석수' 청와대 특별감찰관(이하 특감)과 '우병우' 민정수석일 것이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남자들'이며, 최측근이자 실세(實勢)들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비중을 두자면, 아마도 '우 수석' 일 것이다. 가능한 것이, 우 수석이 비서관에서 수석이 된 후 대통령의 임기 말 구상과 정국 운영에 대한 '판'을 짰을 것이다는 가설이다. 특히, 그가 대통령의 심중을 꿰 뚫는 능력을 가졌고, 입맛에 맞는 참모역할을 하기에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한다. 때문에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줄기차게 요구하는 우 수석 '퇴진'을 결제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추측도 신빙성이 있다. 그래서 우 수석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대통령의 인질(人質)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주특기'는 정치권이나 언론과의 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 수석은 연일 죽을 맛일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번 청와대를 나오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눈만 뜨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자신과 관련된 기사가 터질지, 또는 댓글이 달릴지 가시방석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거취를 명쾌하게 결정하지 못하는 그도 대통령을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관련된 쟁점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그와 가장 친한 검찰 선배 '이석수' 특감이 등장하면서부터 복잡해지고 있다. 필자는 이 특감과 우 수석 두 사람을 남들 보다는 많이 아는 편이다. 젊은 기자 시절 대구지검 경주지청 출입기자로서 그들을 만났다. 그것도 이틀이 멀다하고 대면했다. 기억을 더듬자면 이 특감은 '특수1',우 수석은 '특수2' 전담으로, 사수와 부사수관계였던 것이다. 포항지청이 분청되기 전 경주지청 청세(廳勢)가 지방에서 가장 강했다. 지청장 이하 2개부와 검사 정원이 14명이 되는 등 청주지검이나 제주지검보다 검사들이 많은 '실세청'이기도 했다. 당시 검찰사회에서 공공연하게 한 이야기는 "경주지청에 근무하려면 '실력'이 출중하던지, 아니면 '빽'이 탁월하던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할 정도였다. 현 권력 중심에 있는 두 사람 외 당시 근무했던 젊은 검사들은 현재 검사장 급으로 포진된 것을 보면 허언(虛言)이 아님이 입증된 셈이다. 당시 혈기 왕성한 두 검사는 금괴 밀수사건,정치인 구속 등 일선 지청 단위에서 전국 뉴스를 탈 정도의 대형 사건을 하는 실적을 올렸다. 더욱이 두 사람간의 인간관계다. 연수원기수로는 이 특감이 1기 선배지만 사적으로 특별히 돈독하다는 것은 서로 임지 이동 후 치러진 이 특감 부친상(父親喪) 이다. 이 특감은 독자(獨子)인데, 우 수석은 초상(初喪) 동안 '준 상주역'을 했다. 특히,우 수석은 경주근무 당시 포항지역 건설업체비리 수사를 하다 인사대상자가 아님에도 밀양이란 시골지청으로 이동하는 '역풍'을 맞았다. 통한의 '전별폭탄주'는 선후배간 의리를 더욱 결박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아끼는 후배가 험지(險地)로 전전하는 것을 지켜보고, 가슴아파한 이가 이 특감이었다. 이처럼 우 수석 이름 앞에 '강골(强骨)'이 붙는 것도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변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젊은 날의 시련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25년간의 인간관계가 한 순간에 무너질 형국이다. 목숨을 걸고 쿠테타를 일으킨 '군인'도,그리고 '평생동지'를 외치던 구시대 정치인 등도 '의리(義理)'는 유한했다. 명예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진 검객(檢客)들이 '법폭탄돌리기'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그 의리가 지켜질지 궁금할 뿐이다. 두 사람의 의리와 영광은 빛 바래졌고, 상처만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