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일이 밥상머리에서 밥을 먹는 일만큼 흔하고 쉬운 세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면 카메라 한 대 들고 온 친구가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렇게 찍어둔 추억의 사진들로써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머나 먼 과거로 오갈 수 있다. 사진 한 장의 힘이란 그렇게도 놀랍고 신비하다.  나에게는 그 흔한 초등학교 졸업앨범이 없다. 대신 엽서 크기의 흑백사진 한 장에 담은 졸업사진이 남아 있다. 졸업생이라고는 고작 서른두 명이 전부인 시골 학교에서 6년을 함께 뒹굴던 내 유년의 추억들이 이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빛바랜 졸업사진을 들여다보며 바보처럼 혼자 히죽히죽 웃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진 한 장은 그렇게 나를 그리움에 풍덩 빠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향집 안방에는 파리똥 얼룩이 묻은 사진틀들이 걸려 있는데, 거기에는 부모님의 결혼과 회갑사진부터 형제들의 돌 사진과 졸업, 결혼사진 등이 모자이크처럼 붙어 있다. 사진틀 귀퉁이에는 손톱크기만한 증명사진들이 꽂혀 있는데, 그 변해가는 표정들이 마치 삶의 이력서 같다. 사진틀 앞에 서면 훌쩍 흘러온 가족사가 시간을 멈춘 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갑자기 총각 사진사 한석규의 순하고 착한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게도 아스라한 기억들을 불러오는 분이 있다. 별천지사진관의 최원오(1917~1997, 본명 최인상) 선생이다.  중학생이 되고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처음으로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은 학생이 주인공이야. 자신 있게 앉아. 허리 펴고!" 처음 만난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큰스승처럼 깍듯하고도 권위 있던 분, 그분이 '최원오'선생이다. 선생은 일찍이 공보부가 주관한 신인예술상경연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무대였던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62년에 이미 경주사진작가협회의 모태가 된 경주포토클럽(KPC)을 창립하여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사진에 대한 선생의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이 열정 때문에 몇 차례 사고를 당하고,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남겼다.  선생은 한때 나원사지 나원백탑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탑을 찾지 못한 채 포기하고 돌아오는 열차에 올라 출발하려던 순간 그 탑이 보였다. 순간 선생은 출발한 열차에서 뛰어내렸는데, 이 사고로 한두 해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울릉도에 출사를 갔을 때는 기상이 나빠서 오래 섬에서 머물러야 했는데, 여관비로 카메라를 저당 잡혀야 했다. 한 장의 사진을 얻고자 목숨을 걸던 사람, 그렇게 선생이 걸어간 발자국은 길이 되고, 선생이 남긴 사진들은 역사가 되었다. 무엇보다 1998년 '사진영상의 해'에 선생은 '한국역사사진전'에서 '향토에 묻혀 산 사진가들 9인'에 소개되었다.  그랬다. 선생은 경주의 참모습을 담고자 무거운 카메라를 몇 개씩 목에 걸고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댄 분이다. '별천지사진관'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서 따 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사진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르고자 한 이상향 별천지는 아마도 천년의 땅 서라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선생의 이름을 떠올리는 두 작품은 모두 서라벌의 이야기이다. 하나는 일본 '아사히신문'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 '군상'으로, 신라문화제가 열릴 때 봉황대 위에 모인 관람객들의 얼굴을 찍은 작품이다. 그리고 경주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것 같은, 안압지에서 삼베옷을 입고 낚시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선생의 작품이다. 그렇게 경주를 찍으면서 살아온 선생은 정작 당신이 작고하셨을 때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이 제대로 없어 애를 먹었다니, '짚신장수 헌 짚신 신는다.'던 말이 헛말은 아니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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