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이) 살아가는 세상사에 있어서 '오해(誤解)'하기는 쉽고, '이해(理解)'하기는 어려운 일들이 많다. 동양인으로써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사랑의 별명(別名)은 이해라 했다." 서양 속담에도 이해는 모든 우정의 과일을 낳고 기르는 토양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이해의 뜻은 '사리(事理)'를 분별하여 해석하고 깨달아 알아들음으로 해석된다. 사람은 개개인이 생각(이해)하는 한도에 따라서 유·불신이 생겨난다. 각자의 의견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가 없기에 '규약(規約)'이 있고 '법(法)'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것은 선심(善心)을 베풀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은 쉽게 비웃어 버리는 폐단이 있다. 그래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용(寬容)을 베풀고 최대한 용서하길 바라는 이해심이 발동된다. 남과의 관계가 어긋나거나 모르는 사람의 소행에는 여러 사람의 흉한 것을 종합해서 함정을 만들고 덫을 씌우는 경향이 있다. 성인(聖人)들의 말씀 가운데 인간을 잘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을 결코 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너그러운 평가는 사람의 행동을 비웃지도, 한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며 오직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편한 자세이다. 좁은 생각으로 한 순간의 일을 오해 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곧 쉽게 풀려 이해심이 생길 때도 간혹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젊어서는 자신을 배우고, 나이가 들면 이해를 배운다는 것과 같이, 성공(成功)의 비결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입장과 동시에 타인의 안목으로 사물을 볼 줄 아는 소화력(消化力)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해가 다소 부족한 것을 미온적이라 한다면 쉽게 오해해버리는 결정은 무리한 속단이기 쉽다. 오해(誤解)는 뜻을 잘못 해석하여 생기는 단순한 판단이다. 또한 오해는 전쟁으로 막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의견도 받아 드리는 동정적인 노력으로 풀리는 것이다. 한쪽의 의혹은 다른 한쪽의 기만을 정당화하므로 의심(疑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불신(不信)이다. 그래서 오해는 의심의 '출발점'이라 한다. 범어에도 "지나친 의심은 과오를 범한다."고 했다. 물론 오해의 시발은 잘못된 생각과 판단에서 발생하지만 근원은 의심에서 생긴다. 일본의 한 작가는 "나를 쳐다보게 하는 나 / 나를 의심하게 하는 나 /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나 / 나를 잃어버린 나 / 그리하여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 하면서 오해의 원인을 내 탓으로 여기기도 한다. 성실한 사람은 자신의 성실한 의심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거짓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의심스런 것을 의심하는 일이 거듭되고 있다는 것이다. 급하게 서둘지 말고, 전말을 자세히 점검하여 나중에 결론 맺는 것이 확신이다. 굳게 믿는 믿음에서 그리고 올바른 신념(信念)에서 오해는 이해로 녹아버린다. 이해와 오해를 식별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다. 타고 난 성격이나 성질을 마음이라 하고 사람의 의식, 감정, 생각 등 모든 정신 작용의 근원이 되는 것이어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자주 쓴다. 그래서 선입견은 지성보다 지혜롭고 정의로워야 한다. 이해는 마음의 평정을 다는 '저울'이다. 이해는 만사를 해결하는 능력 있는 '미덕(美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