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大王巖)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부왕 문무왕의 공덕을 기리어 이 바위 밑에 선왕의 관을 묻어 수중왕릉을 조성했다. 그래서 이 바위는 대왕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김동리는 이 바위를 소재로 한 소설'대왕암(大王巖)'을 1973년부터 3년 동안 매일신문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삼국통일과 연관된 우리민족사를 이야기로 구성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동리는 주인공 태종 무열왕을 통해 같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신라·백제·고구려가 통일국가가 되어야 하는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한다. 고구려와 백제와 저희 신라는 우연히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흰 옷을 입고, 같은 검님을 섬기며, 모든 풍속 예절이 서로 통하여 당나라나 왜(倭)나라와는 물론이요, 거란(契丹), 말갈(靺鞨), 돌궐(突厥) 그 어느 나라와도 판이한 같은 한 겨레의 세 나라인 줄 아옵니다. 그러하건만 이 세 나라는 항상 밖으로 당나라, 왜나라, 말갈, 거란 따위로부터 침공을 당할 뿐 아니라 같은 세 나라 끼리도 서로 변경을 어지럽혀 편할 날이 없사오니 이는 마땅히 이해와 신뢰로써 시정되어야 할 줄 아나이다. (김동리, 삼국기,서울신문 408회) 신라의 사신으로 고구려 보장왕을 만난 김춘추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백성들이 흰옷을 입고, 같은 풍속, 같은 예절을 가지고 있는 '한겨레'임을 역설한다. 한 겨레이기 때문에 당나라, 왜, 거란, 말갈, 돌궐 등 이민족과는 다른 동족으로서 서로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세 나라의 정치적 이해와 외세의 작용 때문에 그 제안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태자 듣거라. 내 이 나라의 영구한 보전을 평생소원으로 삼고, 지금 우리 조정의 상대등이자 태자의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과 손을 맞잡고 일어선지 어언 오십년, 처음에는 대국의 군사를 빌려 이웃 나라를 치겠다는 생각은 일으키지도 못했도다.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서로 변경을 침범하지 말고, 서로 도우며 서로 의지하여 화평하게 지낼 길을 찾으려고 단신으로 고구려 서울까지 찾아다니며 온갖 애를 다 써보았지만 모두가 허사로 돌아갔도다. (대왕암·매일신문 288회) 태종 무열왕(김춘추)은 백제 정벌을 앞두고 태자 법민에게 백제 정벌의 이유를 말한다. 그는 같은 민족인 신라·백제가 화평하게 지내도록 모든 힘을 기울였으나, 상대의 잦은 변경 침입으로 소망은 허사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그는 통일만이 민족을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태자가 깨우치도록 한다. 이러한 통일 의지는 신라에 국한되지 않고, 고구려나 백제도 국가 통치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와 백제 근초고왕, 신라 진흥왕의 북진도 통일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의 반도 통일은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신라는 민족의 정립과 대립을 꾸준한 노력으로 극복하고 당(唐)의 야욕을 힘으로 분쇄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통일은 민족의 단합과 사회·문화를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단일민족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신라의 통일정신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현재의 우리 상황에 시사(示唆)하는 점이 많다. 민족의 정립과 대립을 극복한 신라가 당(唐)의 야욕을 물리친 것은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랑정신과 화백의 민주정신, 근초고왕과 장수왕의 민족통일 정책의 의지를 모은다면 남북의 통일도 멀지 않아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