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시대의 '선비'들은 그리도 무서운 절대권력 지존(至尊)인 임금 앞에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직언상소(直言上疏)하는 기개(氣槪)가 있었기에 그들의 선비정신은 세대를 건너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요즘이야 누가 좀 바른 말 한다고 해서 당장 잡아 죽일 사람도 없다. 학자(學者), 지식인(知識人)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는 모르지만, 점잖을 가장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 술 더 떠서 '권력'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것을 보면 이제 우리나라의 '선비정신'은 모두 귀양을 떠나고 병풍 속의 수채화로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본 받을 정신도 존경할 대상도 잃어버린 신세대들의 무분별한 행동인들 뉘라서 꾸짖을 수 있는가? 모든 가치 (價値)가 금전(金錢)으로 환산되고, 어떠한 치졸(稚拙)한 수단과 방법도 출세와 치부(致富)로 합리화 된다면, 우리는 이제 자식들에 대한 교육(敎育)을 아예 포기해야만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운다. 그리고 보고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아이들이 어른들을 공경하기는커녕 어른들을 멸시하기까지 한다면, 그들에게 어떠한 학교 교육도 부질없는 노력일 것이다. 여기서 거창하게 위선(僞善)을 떨며 도덕군자(道德君子)인 냥 후세들을 걱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후세들에 대한 걱정은 차치하고라도 기성세대들의 타락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기성세대들에게 바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 최소한의 윤리 도덕은 타인을 위하거나 이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남은 삶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법에 의해서만 이 세상이 유지되기는 어렵다.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이 무너진 사회의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하라고만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기에 요즘의 '변호사(辯護士)'들을 가리켜, 사회 정의구현을 위한 '변론자'라기 보다는 '무죄(無罪)'를 판매하는 '마켓'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 있다. 개인이 하는 동네 마켓도 있지만 법무법인(法務法人)처럼 대형 마트도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堡壘)가 되어야 할 법조인들의 타락과 무분별한 행동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조차 지키지 않는 그 법을 과연 누가 지키려 할 것인가?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정의가 사라진 사회의 법은 강자들이 약자들을 탄압하는 흉기(凶器)일 뿐이며, 그런 사회가 오래도록 유지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왜 우리는 음식 앞에 절을 하는 별로 합리적이지도 못한 제사문화 등은 여태껏 잘 보존해 오고 있으면서도, 영원히 이어가도 괜찮을 선비정신, 인의(人義)와 예(禮)를 생명처럼 여기던 그 숭고한 선비정신은 송두리체 잊어버렸는가? 이제 추석명절을 앞두고 나는 우리 '제사문화'와 '선비정신'을 좀 물물교환 하듯이 맞바꾸어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식(無識)한 내가 아는 이치를 유식(有識)한 분들이 모를 리가 없고, 제사를 안 지내 주더라도 나라 망하는 꼴을 보고 싶은 조상님들은 없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