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에서 상업에 가장 능한 민족은 중국인이라는 것에는 아마 별로 이견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탁월한 비즈니스 능력과 감각 역시 모두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상인을 천시하는 천상(賤商)의 역사는 매우 뿌리가 깊다. 맹자는 폭리를 상징하는 농단의 주역인 상인을 간사한 부류로 간주하여 매우 천시하였다. 사마천이 살았던 전한(前漢) 시대 초기 역시 예외 없이 사람들은 상인들의 재부를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극도로 천시하였다.  사마천은 전한 무제(武帝) 시기 극도의 억상(抑商)정책과 국가의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시장 간섭에 많이 분노하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흉노(匈奴)와의 전쟁에서 투항했다는 누명(?)을 쓴 이릉(李陵) 장군의 변호로 육체와 정신적, 인격적으로 박해와 모욕을 받았던 터라 특히 정치적으로는 발언권이 없었다. 모든 국가정책결정과정에서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기(史記)의 기술을 통해서, 특히 사기의 한편인 '화식열전(貨植列傳)'을 빌어 상인들의 부를 이룬 경험들을 이야기 하며 매우 우회적으로 당시의 상업과 경제문제,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였다. 사마천은 상인들을 당대의 현자(賢者)로 간주하였다. 그는 또 부가 뒷받침 되지 않는 인의(仁義)는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강력한 '중상정책'을 펼쳐야 할 것을 갈망하였다.  화식열전(貨植列傳)의 화(貨)는 재산, 식(植)은 불어난다는 뜻으로 요즘 시각으로 보면 재테크의 기법인 셈이다. 화식열전에는 춘추시대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사람들, 즉 요즘의 상인, 기업가들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사마천은 이들을 활동을 통하여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능력은 사회생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즉 상업이야말로 의식주 해결의 원류이며 근본이라는 매우 진보적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마천이 상가의 비조이며 탁월한 경제사상가라고 인정한 관중의 부국강병책 핵심요체 역시 '중농(重農)'에 있는데, 사마천은 이러한 중농주의의 기초로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백성을 모두 먹여 살릴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중상주의로의 전환이라고 강조하며 중농억상(重農抑商)의 전통적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정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화식열전의 시기는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고 생산도구의 혁명(철기)이 크게 돋보이는 시기였다. 또한 농업, 공업 상업 등 비약적인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이는 사회생산력의 급속한 향상을 가져왔으며 또 이는 다시 사회적 분업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뿐 만 아니라 화식열전의 시기는 상품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사실상 이 시기는 고대 중국의 상품경제발전이 최고조에 도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한 무제정권의 억상정책은 사실상 시대를 역행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 화식열전은 자유개방경제정책의 추진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정책은 국민이 자유롭게 경영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최상책'이며 국가가 간섭하는 것은 '최하책'이라고 필설하였다. 사마천의 이러한 2000전 경제론은 200년 전 고전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를 가히 뛰어 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식열전은 이렇듯 상업에 종사한 상인도 부를 쌓으면 제왕과 다름없는 '소봉(素奉)'의 삶을 살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2000년 전 화식열전시대의 소봉(素封)은 오늘날의 '화려한 백수'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받는 봉록도 없고 작위에 봉해짐에 따라 받는 식읍의 수입(세금)도 없으면서 이런 것을 가진 사람처럼 즐거워하는 사람들, 즉 이들이 소봉이다. 천금을 가진 자는 한 도읍의 제후와 맞먹고 수만금의 부를 가진 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 하니 그들이야말로 진정 '소봉'이라 할 만하다하고 하였다. 벌어놓은 돈으로 부동산, 임대업이나 주식펀드에 투자해서 평생 쓸 만큼의 재산을 형성해 놓고 권력자들과 교류하며 즐기는 '현대판 소봉'인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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