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가을,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촌(興隆窪村)에서 흥륭와문화(B.C. 6200-5200)에 속하는 최초의 유적지인 '흥륭와유지(B.C. 6200-5400)'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오한기 지역에서도 유일하게 요하의 수계(水界)가 아닌 대능하(大凌河) 수계의 지류인 망우하의 상류지역이다. 1983-1984년 중국사회과학원 내몽고공작대 주도로 흥륭와유지에 대한 최초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최근까지 10차례의 발굴 결과 총면적이 약 3만 5000㎡에 달하는 흥륭와유지는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신석기문화로 밝혀져 '흥륭와문화'로 명명되었다. 흥륭와유지 A지구에서는 보존이 잘 된 환호(마을의 주변을 보호하기위해 둘러싼 도랑)로 둘러싸인 취락이 발견되었는데, 유적지는 동북-서남의 길이가 183m, 서남-서북의 폭이 166m의 불규칙한 원형의 회토대(灰土帶)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것이 취락을 둘러싸고 판 환호임이 밝혀졌고, 환호의 폭은 1.5-2m 깊이는 0.55-1m 정도이며, 환호의 안쪽에는 약 100여 개가 넘는 반지혈식 방 유적이 발견되었다. 방은 경사진 문도(門道)가 없는 장방형이며, 1줄에 10여개씩 11-12줄로 방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으며, 방은 크고 작 구별이 있어서 마을 중앙의 회의실로 추정되는 가장 큰 방은 약 140㎡로 우리나라 평수로 약 40평 아파트만하며, 주거용 큰 방(F1)은 길이 8.5m 폭7m 정도이며 가장 작은 방은 길이 5.1-5.4m 폭 3.5-3.8m 정도였다. 이 취락유적이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혹은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으로 불리는 동북아시아 최초의 취락유적이자 최초의 환호로 둘러싸인 취락유적이다. 동북아시아 최초의 마을인 것이다. 유사한 환호취락유적은 세계 최초의 기장과 조가 나온 같은 시기의 흥륭구유적(興隆溝遺址) 등에서도 발견된다. 흥륭와유적 마을 전체(183m×166m)를 감싸는 환호의 총 길이는 698m나 된다. 환호를 파면서 나오는 많은 흙은 환호 주변에 쌓아서 토성(土城)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외적이나 사나운 맹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노동력이 드는 마을을 만들고 몇 달 살고 이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환호취락은 이들이 정착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약 100-120 가구가 모여 살았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리(里) 단위의 시골 마을은 현재도 50-70가구 정도가 일반적이고, 100가구 정도의 마을은 예외적으로 큰 마을이다.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100-120여 가구에 평균 4-5명이 살았다고 가정하면 약 400-600명이 마을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했었다는 것이다. 흥륭와문화 사람들은 이런 집단 주거지에서 기장과 조를 재배하며 정착생활을 했던 것이다. 흥륭와문화 흥륭구유지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기장과 조가 야생종이 아니라 재배종이라는 것은 이런 정황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는 농경 위주의 경제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여전히 채집, 수렵이 주이고 농경이 병행되는 시기였다.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우리는 일반적으로 만주지역은 미개한 야만인의 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흥륭와유지, 흥륭구유지 등으로 대표되는 흥륭와문화의 발견은 이러한 전통적인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