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걷는 즐거움은 남다르다. 역사의 흔적이 퇴적돼 있어 진중하고 고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가꿔온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격조 있다. 그래서 상업화 되고 규격화 된 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감상을 전한다. 요즘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관광도시보다는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고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파리나 로마, 바르셀로나 대신에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동부유럽이나 발칸반도, 러시아 연방에서 독립한 국가를 찾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발트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도시다. 1991년 독립한 이후 북유럽의 최고 관광도시로 떠오르려는 노력을 하는 이 도시는 800년의 역사가 곳곳에 담긴 돌담길로 뒤덮인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구시가지 하나로 세계의 여행자들의 구미를 자극하고 있다. 탈린 구시가지는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만큼 작은 규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탈린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하루에 세 번은 그곳에 나가봐야 한다고 한다. 새벽안개도 가시지 않은 새벽녘과 한낮의 밝은 햇살에 드러난 도시, 그리고 해가 진 후 야경을 제대로 감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단순하게 역사적, 중세적 도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콘텐츠를 입혀 다양한 모습을 구사한다는 얘기가 된다. 경주도 그런 시도가 있다. 한낮의 경주를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야경과 달빛에 의존해 고도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들이 집약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데 한계가 있다. 경주 특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구시가지는 이미 현대화돼 버렸고 한옥마을의 밤길은 너무 어둡다. 신라의 문화유산을 제외하고 경주를 즐길만한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것이 치명적인 한계인지 모른다. 24시간 고도를 거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경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은 경주 관광산업의 핵심적 요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상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