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과 사마천은 출신이 다르다. 활동의 시대가 달랐다. 그러나 그 둘의 인생역정은 그렇게도 닮아있었다. 그들의 인생관, 의리관, 그리고 생사관, 특히 경제가치관은 놀랍도록 닮았다. 관중은 사마천에게는 시대를 초월한 지기(知己)이며 인생의 롤 모델(role model)이었다.  관중은 삶의 고달픔을 알았다. 생활의 어려움을 알았고 생존에서 재화의 중요성을 알았다. 호리지성(好利之性)의 물질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며 부의 추구에는 별다른 학습이 필요치 않음을 알았다.  관중과 사마천의 인생관은 다른 시대에 산 한 사람인 것 같다. 다만 관중은 '입공(立功)'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고 사마천은 '입언(立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을 뿐이다. 사마천은 궁형(宮刑)의 치욕과 그로 인해 소인(小人)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가야함에도 마음 속 깊이 품은 큰 뜻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정신. 공명(功名)을 추구하며 뜻을 이루려는 인생의 가치관, 불굴불요(不屈不搖)의 좌절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 역시 모두 관중의 그것이었다. 사마천의 삶의 그늘에서도 오히려 낭만적인 호방함과 영웅주의적인 기개, 낙관적인 인생의 태도는 바로 관중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관중의 국가와 사회를 위해 공헌하려는 '입공(立功)'의 길과 사마천의 시대에 대한 신념과 시대가 그에게 부여한 사명 '입언(立言)'의 길은 본질적으로는 같았던 것이다. 사마천의 생사관과 의리관은 또한 관중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사마천의 뿌리는 유가로부터 시작되지만 소위 '실절(失節)'과 '의리(義利)'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공자와 정면으로 배치되며 오히려 관중과 매우 흡사하다. 관중은 자기가 주군으로 모셨던 공자 규(糾)의 스승 소홀(召忽)처럼 절의를 지켜 자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적으로 훗날 왕위 쟁탈전의 승리자 소백(훗날 제 환공)의 뜻을 받들어 제나라의 부국의 꿈을 실현하여 궁극으로는 춘추오패의 맹주국이 되게 하였다.  사마천은 '부를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재물을 중시'하는 것은 귀천빈부(貴賤貧富)에 관계없이 천자(天子)에서 일반 서인(庶人)까지 모두가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물질욕망에 합리성과 타당성을 부여해주었다.  그는 다만 노동(作力)과 지혜(鬪智)를 통한 치부와 왕공대부의 권력에 의지한 생산경영의 노력을 통하지 않은 치부를 구분하였을 뿐이다. 이 둘은 이렇게 시대를 초월하여 서로 통하였던 것이다.  상가(商家)의 비조(鼻祖)로서 관중의 대업의 길에 대한 평가는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공자와 맹자도 그에 대한 평이 사뭇 다르다. 공자의 관중의 품덕(品德)과 품행(品行)에 대한 혹평은 유명하다.'그는 그릇이 작고(器小) 예의를 모르며(不知禮) 매우 사치스럽고 호화로우며 절약과 검소함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관료로서의 관중의 덕은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즉 관중은 '인덕(仁德)'한 '인인(仁人)'이라고 극찬하였다. 제 환공이 주나라를 섬기며 무력과 전쟁에 의지 하지 않고 제후국간의 다툼을 불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관중의 공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관중에 대한 평가는 가슴이 저릴 정도이다. 맹자는 관중과 같은 무리와 함께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게 여겼다. 심지어 관중은 '가짜 인의'를 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제나라에서의 모든 정치정책은 '인정을 베풀고 왕도를 행함'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공자의 성격과 맹자의 성격,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다른 시대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늘 신중하고 겸손하며 또한 스스로의 분수를 잘 알며 심지어 본인은 똑똑하지 못하나 다만 학문을 즐겨할 뿐이라는 공자의 성격과 스스로를 매우 높이고 자부심이 강하면서 호걸과도 같은 호방함을 가진 맹자의 성격과 그가 살았던 전쟁과 살육의 패도를 중시하는 시대적 특징에 기인한 것이리라. 물론 맹자 역시 관중이 영웅호걸임은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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