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고복수 선생의 노래 '짝사랑'에 등장하는 '으악새'는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 잘 알려졌듯이 억새풀을 가리킨다. 바야흐로 그 으악새가 슬피 우는 계절 가을이 깊어가면서 여기저기서 단풍놀이 이야기도 들린다. "우리도 단풍놀이 갑시다." 아내의 제안으로 집밖을 나선다. 단풍놀이가 별것인가, 대문만 나서면 단풍이요, 억새꽃이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것을. 내 고향 암곡동 무장사지 가는 길은 시월이 시작되면서부터 등산객들로 북적댄다. 우리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향하는 길을 비켜서 버스 종점인 마을회관 앞에서 왼쪽 골짜기로 들어선다. '깃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호젓하여 좋다. 나는 어려서부터 쇠꼴을 베러 이 길을 오갔으므로 낯에도 익다. 무엇보다 깃골 솔숲은 나에게 '황술조(黃述祚)'라는 이름 석 자를 만나게 해준 장소이다. "화백토수황술조지묘(畵伯土水黃述祚之墓)"라 적힌 비석을 통해 이곳이 토수 황술조 화백의 묘임을 알 수 있다. 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1904년에 태어나 1939년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발견하고는 잠시 '아' 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참으로 짧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서 산 36년의 시간은 어쩌면 불꽃같은 정점으로 타올랐다가 푹 재로 꺼져버린 삶이었다. 황술조는 경주 황오동에서 태어났다. 내로라는 부잣집의 둘째아들이었던 그는 지금의 계림초등학교 전신인 경주공립보통학교를 다녔고, 그 후 서울로 올라가 양정고보에서 공부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귀국한 뒤 그는 개성의 호수돈여고와 개성상업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1936년 고향 경주로 돌아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 상임고문으로 일하면서 이 땅을 마지막 떠날 때까지 다도, 조경, 고미술 등에 심취했다. 황술조는 선전(鮮展) 곧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선전 출품은 화가로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거쳐야 할 길목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의 보수성에 저항하는 의지가 더욱 굳세었다. 대신 동미전 목일회 협전 등의 동인활동에만 참여했다. 이들 전시회의 경우 당국의 감시가 심해서 가령 목일회(牧日會)만 하더라도 단체 이름에 반일사상이 엿보인다는 이유로 명칭을 목시회(牧時會)로 바꾸어 활동했을 정도이다. 토수(土水)라는 그의 호처럼 황술조는 장마 뒤의 흙탕물 같았다. 거칠고 궤도에 얽매이지 않았다. 양심을 거슬러 출세나 태생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일도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젊은 성정은 그의 작품 속 어딘가에 색으로 선으로 스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 늙지 못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처럼 황술조는 그 푸른 나이에 동백처럼 시들지 않고 툭 떨어졌다. 어떤 이는 그의 이런 자유분방한 삶에 대해 손가락질한다. 술버릇이 목숨을 재촉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식민지의 젊은이로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 시절의 젊음에 대해 함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윤동주의 '참회록' 중)라고 스스로 참회하려던 그 푸른 젊음들을 어찌 쉬이 판단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을 버리고 스스로 좁은 길로 들어선 이들의 고난과 갈등에 대해서 우리는 결단코 말할 자격이 없다. 침략자에 맞서 억새처럼 울되 결코 꺾이지 않으려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미술평론가 윤범모 씨는 황술조를 두고 "30년대 화단(畵壇)의 유성(流星)"이라고 표현했다. 지금 그의 작품은 호암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어 그 가치를 인정한다. 얼마 전에는 수채화 '수련'이 공개되어 화단에서는 오랜만에 다시 황술조라는 이름을 언급해야 했다. 솔거미술관 개관을 기념하여 경주미협이 연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가을 숲으로 햇살이 빗금을 그리며 떨어진다. 오늘 내게 그 빛의 의미는 시들지 않고 떨어진 수많은 젊음에 대한 오마주이다. 우리는 어쩌면 외롭고 찬란하던, 수많은 젊음에 대해 빚진 채 오늘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