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읍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상주에 성을 쌓은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687년 상주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109보라는 기록과 그 이후 경상도 속찬지리지에서 1385년(우왕 11) 읍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3,458척이고 높이가 9척 7촌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일반적인 견해는 후자의 기록 읍성을 처음 쌓은 기록으로 보고 있다. 읍성을 1385년에 쌓았다고 하더라도 500여년을 유지되었던 시내 최대의 인공 구조물이 일제강점기인 1912년 철거가 시작되면서 지금은 흔적하나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사라진 원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읍성이 최초 훼철되었다고는 하나 그 자리는 조선인 스스로도 파괴하여 왔었고 지금도 파괴가 계속되고 있는 아쉬운 현실이다. 읍성의 형상은 사라졌지만 지적도에 의해 그 형태가 남아있어 규모가 확인되는데 둘레 1.7㎞, 남북길이 440m, 동서 길이 520m, 면적은 내부 18만5천㎡, 외부 21만2천㎡정도로서 현재의 시가 중심지 대부분이 포함된다.  이 성 안에는 동헌, 객사, 이방청, 형리청, 교방청 등의 관아와 성 밖에 상주목을 방어하는 진영, 풍속을 교화하고 목사를 보좌하는 향청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이 관아 건물은 한일합방 전후로 관아 건물이 서서히 '왜색화(倭色化)'되면서 훼철과 이전이 되면서 원형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 그 자리에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은 '향청(鄕廳)'이 유일한 상황이다. 이렇게 사라진 읍성 자원을 복원해서 옛 대도회지의 정체성을 되살려보자는 오랜 상주의 여망이었으나 존재가 확인되는 자료의 부재와 막대한 사업비가 소요되기 때문에 현실화와 지역 여론을 형성하지 못했다. 때 마침 지난해 상주읍성 성문과 시내 전경이 촬영된 사진이 발견되었고, 그 이후 관아의 모습이 촬영된 시내 전경과 관아 건물 사진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어 지역의 관심과 읍성의 실체에 한층 더 접근하고 있다. 읍성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여 전체 복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현 시점에서 옛 고도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정통성 있는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옛 관아의 일부와 북문, 성벽의 복원으로 고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상징적 공간의 보전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경상북도, 전라남도, 상주시, 나주시의 4개 자치단체가 800억원 규모의 '영호남 지명유래 고도 전통문화 자원화 사업'을 중앙부처에 사업을 신청 해 놓고 있다. 아울러 도심지에 관아 복원이 어려워 상주 초입부인 복용동 일대에 250억원 규모의 옛 관아를 재현하는 '태평성대 경상감영공원 조성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사라진 읍성시설을 복원한다는 의미는 물질적으로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서 활용되는 활용성도 중요하나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일제에 의해 소멸된 우리의 정신문화 복원의 의미에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고도 모습 유지를 위해서는 민관의 통일된 열망과 막대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시민의 열정과 희생이 있어야 만 가능한 것이 복원 사업이다. 지금까지는 읍성의 지표조사를 통해 고고학적 조사에 접근만 하였을 뿐, 성곽의 실체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는 한 번도 없었다. 토지 소유자 등에게 재산상 다소의 불편이 초래하더라도 이를 수용하는 성숙된 시민정신과 배려가 필요하다. 또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무분별한 읍성 유적에 관한 파괴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보존할 필요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선별하여 보존되어야할 것은 보존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도심에서 최소한 면적으로서 고도 이미지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지점을 읍성 유적 지구로 보존하여 도심의 관광자원으로서 지속적인 활용되어야 만 읍성의 역사자원이 보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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