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왕 7년(1381)에 쌓여진 것으로 추정된 상주읍성은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4년(1591) 왜적에 대한 대비로 증축되었으며, 이때 호참(濠塹)시설이 보강되었다. 또한 1870년 고종 때에 전국의 읍성을 보수할 때, 사대문과 성첩을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주읍성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읍성은 대부분 20세기 초반에 훼철되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광무 11년(1907) 8월 1일자 관보(官報)에 공포된 '내각제1호 성벽처리위원회(內閣令第一號 城壁處理委員會)에 관한 건'에 기인한다. 최근 상주시에서는 상주 역사 찾기 및 회복 차원에서 상주읍성의 주요 부분을 재현하고자 하고 있다. 읍성과 관련 유적의 재현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정성'과 '완전성'이다. 현재 상주읍성은 비지정문화재이기 때문에 각종 개발 압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성벽 터와 해자 터의 경우 도로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 내부의 경우 4층 이하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상주읍성 북쪽의 경우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읍성 내도 곧 개발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읍성 내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 개발시 매장문화재 '입회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매장문화재의 훼손이 우려된다. 이러한 개발 압력으로부터 상주읍성 성벽 및 관련유적의 보존을 위해서는 동 유적에 대한 경상북도지정 문화재 지정이 필요하다. 상주읍성의 보존을 위해서는 먼저, 청주읍성과 같이 성벽과 해자가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매장문화재 조사를 선행하여 그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재 지정을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상주읍성 성벽 전체에 대한 문화재 지정이 어렵다면 왕산역사공원 주변만이라도 지정한 다음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을 고시하여 상주읍성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상주읍성의 상징적인 재현을 위해서는 먼저 상주시민들의 의지가 중요하다. 상주시에서 좋은 사업을 정책적으로 추진한다고 해도 시민들이 원치 않은 사업은 추진에 어려움이 있다. 상주읍성 재현이 시민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임을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청주시에서 청주성 탈환 축제를 통하여 청주읍성을 시민들에게 알렸듯이 상주시에서도 상주읍성과 관련된 컨텐츠를 개발하여 축제로 기획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상주판관 권길, 호장 박걸을 비롯한 상주 민병 800여명이 일본군 주력부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7,000여명의 병력을 맞아 4월 25일 산화한 사실과 정기룡장군이 상주읍성을 탈환한 사실을 근거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당시 상주인들의 의기를 널리 알리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상주시에서도 읍성 내 전통시장과 연계한 야행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야간에도 상주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여 국내외 관광객들이 스쳐 지나가는 상주가 아닌 머물다 갈 수 있는 상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상주읍성과 관련된 축제나 야간 투어 프로그램의 추진도 중요하지만, 가장 앞서 시행하여야할 것은 상주읍성 성벽 터나 주요 유적지 터를 알리는 것이다. 상주시민들이나 상주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상주읍성 및 관련 유적지 답사를 하고 싶어도 위치를 모르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주읍성의 상징적인 재현을 위해서는 상주시민은 물론 이곳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상주읍성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정하여 재현의 필요성을 공감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주시에서는 연차적인 계획을 세워 읍성 내 주요 유적지 터 토지를 지속적으로 매입하면서 상주읍성을 손쉽게 찾고 이해할 수 있는 안내판과 표지석을 설치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원, 예총 등 시민단체에서는 시민들과 공감할 수 있는 축제나 행사를 기획하여 상주읍성이 상주시민들의 생활에 걸림돌이 아닌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인지시켜야 한다. 또한 상주시민들은 상주시 역사 회복 차원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로 훼철된 상주읍성 '성돌'을 찾고 모으는데 합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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