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어디 나뭇잎에만 물들던가. 사람들의 옷에, 표정에, 뒷모습에도 알록달록 물드는 것을. 황성공원에도 곱게 가을이 내려앉았다. 마음 급한 녀석은 벌써 낙엽이 되어 내려앉는다. 그 위로 청설모가 이 나무 저 나무를 오르내린다. 호림정에서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궁사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터질 듯 팽팽해졌다가 한 없이 자유로워지는 화살의 궤적을 따라가면, 늦가을의 바람 한 점이 일렁인다.  그대 며칠 전 팔 백리 밖 아화 안말에서 띄워 보낸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오늘 아침 동남풍과 함께 닿아 내 몸의 숨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오다. 흘러들어와 그 말의 숨결이 내 심장의 피 덥히며 온몸을 흐르다. 팔 백리 밖 사람아, 그대 사랑한다는 말의 하늘 길로 또 내 말을 보낸다. 오늘밤 금강이나 추풍령 상공에서 내 말은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소리치며 떠 헤매 가리라.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이 나라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한 마디씩 씨받아 팔 괴고 잠들어라.  이경록의 시비에 새긴 '사랑가'이다. 가을의 단풍처럼 몸살을 앓는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위한 오마주일까? 이경록 시비는 목월 노래비와 동리 표징비, 오세재 문학비가 있는 황성공원으로 지난해 연말에 옮겨왔다. 원래는 30년 전 경주시 진현동 '우정의 동산'에 세웠다. 이경록은 1948년 경주시 강동면에서 태어났다. 황남초등학교와 경주중, 경주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이미 고등학교에 다닐 때 충남대에서 주최한 전국고교생백일장에 참가해 시부 장원을 했고, 건국대와 대전대, 미국 오스틴 대에서 주최한 고교생문예공모에서도 시 부분 당선을 휩쓸었다. 그 외에도 충청일보 신춘문예(학생부)와 신라문화제백일장 등에서도 장원했다. 시인으로 등단한 계기는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서이다.  이경록은 1976년 박해수, 이기철, 이동순, 이태수, 정호승 등과 함께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중 백혈병이 발병하여 1977년 스물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한창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홀로 남은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고, 드라마틱한 그의 이야기는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유고시집 '이 식물원을 위하여', '그대 나를 위해 쉼표가 되어다오', '나는 너와 결혼하였다'등이 그가 떠난 후 발간되었다.  이경록이 죽음의 언저리를 헤매던 겨울밤, 수녀 한 분으로부터 종부성사를 받도록 권유받았다. 그러면서 영세명으로 '요셉'을 제안했다. 그러자 이경록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시인인데, 이경록이라는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시인인 줄 알지 않겠어요? 요셉이라고 하면 아무도 내가 시인인지 모를 텐데…." 그러면서 이경록은 손바닥에 '시인'이라고 손가락 글쓰기를 써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경록이라는 이름은 죽음 앞에서도 끝내 시인이고자 했던 사람으로 우리들 뇌리에 남았다. 실제로 그는 "좋은 글만 쓸 수 있다면 손가락을 잘라도 좋다"고 절규할 정도로 시작에 치열했다. 시를 쓰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담고자 한 사람, 생명처럼 귀한 것으로 여긴 사람, 그가 이경록 시인이었다.  내년이면 어느덧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40년이 된다. 만삭이던 아내는 이제 칠순을 바라본다. 여전히 남편 이야기를 하면 그렁그렁한 눈물이 고일만큼 애틋하다. 시비 뒤로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젊은 천재시인의 열정처럼 뜨겁다. 나는 들꽃 한 송이 꺾어 그의 시비 위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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