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화 후기(B.C. 3500~3000)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유적'에서는 각종 돌을 이용한 '적석묘'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요하문명 지역에서 최초의 적석묘가 나오는 것은 흥륭와문화(B.C. 6200~5400)에 속하는 백음장한 2기에서 부터이다(12번째 이야기 참조). 그러나 흥륭와문하의 다른 유적에서는 대부분 토광묘(土壙墓)이기 때문에 흥륭와문화의 대표적인 묘제로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어서 별로 주목을 못 받았을 뿐이다. 홍산문화 시기에 오면 다양한 형태의 적석묘가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북아 적석묘의 본격적인 기원을 홍산문화 시기부터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적석묘 혹은 '돌무지무덤' 이라고 부르는 것은 발전 단계에 따라 혹은 무덤의 양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구별한다. 첫째, 흙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은 다음에 큼지막한 돌을 쌓아서 덮은 토광적석묘(土壙積石墓)가 가장 간단한 양식이다. 둘째, 얇은 판석(板石)으로 묘실을 두르고 시신을 안치한 다음에 또 다른 판석으로 뚜껑을 덮고 묘실 주변에 돌을 쌓아 올린 것이 '석관적석묘(石棺積石墓) 혹은 적석석관묘(積石石棺墓)이다. 간단히 석관묘(石棺墓) 혹은 판석묘(板石墓)라고도 부른다. 셋째, 적석석관묘의 묘실 주변만이 아니라 그 위에도 많은 돌을 높게 쌓아 올리면 보통 적석총(積石塚)이라고 부른다. 적석총은 경계부분인 기단이 분명하지 않고 그냥 돌을 쌓아 올린 무기단식적석총(無基壇式積石塚)과, 기단의 경계를 분명하게 돌로 표시하고 돌을 쌓은 기단식적석총(基壇式積石塚)으로 나눈다. 넷째, 각종 적석묘 계통의 가장 발달된 형태의 것이 피라미드식 혹은 계단식으로 몇 층을 쌓아 올린 계단식적석총(階段式積石塚)이다. 놀랍게도 우하량유적에서는 이 모든 형태의 적석묘들이 모두 보인다. 특히 규모가 큰 무덤들은 모두 가장 발달된 형태의 계단식적석총이다. 크기도 보통 한 변이 20~30m에 달하는 3층의 계단식적석총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아직 완전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하량 제13지점의 계단식적석총은 긴 쪽의 지름이 100m이고, 좁은 쪽의 지름이 60m에 높이가 17m에 달하는 거대한 7층 원형의 계단식적석총이다. 또한, 우하량 제2지점의 1호 계단식적석총과 2호 계단식적석총의 기단부에는 놀랍게도 돌을 네모나게 벽돌처럼 다듬어서 경계석으로 놓았다. 있는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것이 아니라 모두 다듬었다는 것이다. 5500년 전 홍산인들은 금속기도 없었지만, 약 50×30cm 크기로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정성스럽게 계단식적석총의 기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홍산문화에서는 5500년 전에 여신묘, 수많은 거대 적석총, 정교한 옥기 등을 짓고 생산하는 거대한 절대적인 권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의 대 원로 고고학자인 고(故) 소병기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홍산문화 후기에는 이미 '고국(古國)' 혹은 '군장국가(君長國家: Chiefdom)' 단계로 문명사회에 진입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적석묘는 요하문명 흥륭와문하 시기에 기원하여 홍산문화 시기에 보편적인 묘제가 되고, 고조선, 흉노, 돌궐, 부여,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일본 지역까지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