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단히 많은 종류의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주류(酒類) 역시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이 고안해 낸 음료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인간들은 수백 종이 넘는 술을 마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류의 과일이 재료가 되는 각종의 과즙음료가 있으며 또 여러 가지 탄산음료 그리고 약제가 첨가된 드링크류, 그 외에도 커피나 각종 다류(茶類)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음료를 각자의 기호(嗜好)에 따라 즐겨 마시고 있으니 참으로 호사스러운 음료문화라 아니할 수가 없다. 내가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마실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고, 가장 유일한 차는 쌀을 씻어낸 뜨물로 만든 '숭늉'이 고작이었던 것 같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요즘도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는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은 '맹물'일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모닝커피 대신 냉수 한 잔, 식사 후에도 냉수 한 잔, 그리고 잠들기 전에도 다만 냉수 한 잔을 즐긴다. 나는 냉수이외에 선호(選好)하는 음료수가 없기도 하지만, 특히 '커피' 마시는 습관을 익히지 못했다. 불과 수십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 커피문화 덕분에 우리는 지금 년 간 어마어마한 액수의 외화를 커피 수입에 쓰고 있다고 하는 데, 사실 내가 커피에 맛을 들이지 못한 대는 남다른 동인(動因)이 있었던 것 같다.  6.25 동란 직후 어릴 적 바닷가에 살 때, 수륙양용주정을 타고 해안으로 올라온 미군병사가 던져준 것들 속에 조그마한 은색봉지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소위 요즘 말하는 '인스턴트커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미국사람이 던져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대단히 귀하고 맛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또래들과 한바탕 난투극을 벌이며 그것을 겨우 노획하여 집으로 가지고 왔는데, 당시 먹는 방법을 전혀 몰랐던 나는 봉지를 뜯은 후 그 짙은 갈색 가루를 그만 그대로 입안으로 털어 넣고만 것이다. 이제 여기서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 후 내내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커피란 것은 나에게 지독하게 쓴 몹쓸 음식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커피는 그렇다 치고, 나는 한 때 또 좀 고상하게 차를 마시는 기호를 가져보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역시 모두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유인즉 나는 우선 모든 종류의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스님께서 그렇게도 예찬한 그 그윽한 '녹차'의 향기조차 나에겐 시원한 냉수 한 잔이 주는 무맛의 맛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디디 무딘 나의 감성(感性)과 후각(嗅覺)은 그 그윽하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녹차냄새 속에서, 고작 어릴 적 소(牛) 여물 삶는 냄새를 재발견했을 뿐이다.  결국 녹차라고 하는 것도 푸른 나뭇잎을 말린 것인 만큼, 거기서 배어 나오는 향이라는 것도 사실은 풀 냄새일 뿐이며, 그 씁쓸한 맛도 사실은 대부분의 녹색식물에서 느낄 수 있는 엽록소(葉綠素)의 맛이 아닐까? 가장 좋은 향기는 나뭇잎을 펄펄 끓는 물에 울쿼낸 그런 냄새가 아니고, 싱싱하게 숲 속에 그대로 살아있는 자연의 냄새일 것이다. 나는 가장 훌륭한 음료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어떤 맛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물(H2O)이라 생각한다. 거기에 어떠한 맛이나 향이 첨가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잡맛일 뿐이다. 비록 그것이 녹차향일지라도…. 고로 나는 사람이 마시는 것 중에 가장 고급음료는 어떠한 맛이나 냄새도 없는 순수한 물을 따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물을 끓여 그기에 온기가 더해지는 것조차 잡맛이라고 생각한다. 땅 속 깊은 곳에서 금방 솟아 나온 시원한 냉수 한 잔이야말로 천하의 명차(名茶)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맛은 다른 음식이나 음료수처럼 혀나 코가 느끼는 맛이 아니다. 물맛은 목구멍에서부터 전 오장육부가 함께 느끼는 맛이며, 인간의 오감(五感)을 초월한 신령스러운 맛이다. 하기에 나는 여러 가지 환경오염 중에서도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물의 오염이며, 이러한 '무(無)맛의 맛'을 즐기는 나의 최상의 기호를 잃을까봐 늘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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