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에서 일사늑약의 부당성을 외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사설은 언론의 본분을 추상(秋霜)같이 외쳤다. 일제 강점기 국치의 원인과 광복의 방략(方略)를 설파하여 3천만 동포의 피를 끓게 한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의 한국혼(韓國魂)도 우리의 건망증이 망국을 불렀다고 했다. 나를 잃어버린 것에서 오는 슬픔, 주인의식을 망각한데서 오는 탄식, 노예의 근성에서 벗어나자는 절규가 내 귀에 메아리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언론의 방송채널과 종이신문, 전자신문, 인터넷방송 등의 각종 미디어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시간이 많은 경로당 어른들은 온종일 TV를 시청하다보니 '정치박사'가 되어있다. 똑같은 사안을 수도 없이 반복 재방되니 질려서 TV를 치워버리고 싶다고까지 하신다. 선거철에는 종일 각종 정치문제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언론의 기능'은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지, 언론이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는 사람을 기사거리로 삼거나 또는 이해득실에 따른 '편파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잘못된 언론보도 형태는 무고한 피해를 낳을 수 있다. 나는 신문을 하루도 읽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은 것처럼 허기가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토록 좋아하던 신문의 정치면을 시의원이 되고 나서부터 멀리하게 되었다. 기사는 생생한 현장취재가 원칙이다. 그런데 시의원이 되고 기자의 생각과 편견에 따라 현장취재하지 않은 기사가 '왜곡 보도'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 다르고 '어' 다른 표현으로'살아있는 언론'이라는 권력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전문가인 것처럼 이름만 올리고 소속과 직책을 밝히지 않은 기사가 인터넷을 공유해 가며 여론을 호도하고, '언론 홍보비'를 쥐고 있는 집행부와 기관단체의 입김에 따라 기사가 본질이 흐려지는 것도 보았다. 시민이 알아야 할 중요한 기사도 언론의 성향에 따라 보도되지 않는 것도 보았다. 언론의 힘은 사실에 근거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보도해 주었을 때 정의로운 사회로 정립되어 갈 것이다. '언론(言論)'은 이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번 지진과 태풍 보도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보도 방향에 따라 시민들의 불평불만이 많아질 수 있으며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초래 할 수도 있다. 잘못된 언론의 보도로 불평불만이 많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 긍정적인 시민이 많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 나는 기자들에게 사회에 '이득'이 없는 사안은 보도를 '자제'하고,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널리 알려 시민들에게 행복 하고 싶은 동기 부여의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언론이 어떤 사안에 있어서 정책적 대안 제시를 하는 점에서는 시의원의 역할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시민의 편에 서서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사업은 감시를 하고 견제와 협조를 병행하며 불특정 소외계층을 편드는 언론이 많았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는 정치적으로 조선시대 당파싸움 하는 것처럼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체성에 혼란을 주고 있다.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은 경제가 희미한 달밤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백년지대계의 교육은 사춘기 청소년처럼 방황을 하고 있다. 사회의 공공질서는 실종되어 법치국가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갈증'이 난다. 하루 해 긴 시간들이 앞을 다투며 줄을 서는 활자들로, 불특정 모든 다수의 사람을 보호하고 계도 할 수 있는 언론의 힘으로,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길 소망한다. 진실에 근거한 사실 보도를 통해 문화예술의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 내어 지역민과 함께 하는 언론의 역할을 기대한다. 지역 이기주의와 주민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도 잘 풀어 지역화합을 이끌어내는 선도적 역할도 기대한다. 지역 현안뿐만 아니라 전국, 나아가 세계의 흐름을 진단하여 지역민들에게 방향제시를 하는 언론을 갈망한다. 나는 오늘도 시원한 사이다 같은 언론의 도움을 받아 시민을 위한 시정을 함께 펼쳐나갈 것을 기대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