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었다. 단풍든 토함산 길 구불구불 오른다. '장항사지(獐項寺止)' 가는 길, 잎이 지고 있었다. 석굴암 가는 길 반대쪽, 산정에 거대한 '경주 풍력발전기'들이 무슨 괴물처럼 돌고 있다. 고도 경주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길은 시원하게 뚫려 장항사지 가는 길이 지금은 승용차로 너무 쉬워 옛날의 그윽하고 깊은 맛을 잃었다. 아아, 십몇 년 전 '장항사지'를 찾아 고생하던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그 때의 '장항사지'는 깊고 깊은 토함산 골짜기에 수줍은 새악씨 처럼 숨어 있었다.  추령터널 넘어서 장항리… 산등성이 생김새가 '노루의 목' 같다고 '노루목' 장항리라 했던가. 이름만 듣고 무작정 찾아갔던 '장항사' 길이었다. 길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십리 가까이 걸어작은 화강석이 깔린 시골길을 한참 올랐었다. 첫째다리 둘째다리 '장항교'를 지나 길이 끝나는 언덕배기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가, 느닷없이 갑자기 만났던 우뚝한 5층 석탑 꼭대기! 그때의 그 감동, 얼마나 호젓했던지…. 대단했었다. 주변의 산수 풍광이 천년유적 이었다. 지금은 옛날의 그 감동은 사라져 버렸다.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신라 사람들은 왜 이토록 깊고 그윽한 곳에 그토록 화려한 절을 세웠을까? 왜 그랬을까? '장항사지'! 참 매력적인 곳이다. 오층탑과 파괴된 대형 석불, 오층탑 1층 탑신에 새겨진, 살아있는 것 같은 '돋을새김'한 '인왕상'들의 뛰어난 조각들도 훌륭하지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문비에 새겨진 '웃고 있는 도깨비' 들이다.  도깨비들은 왜 웃고 있을까? 신라의 도깨비들, 과연 무엇인가? 내 호기심은 자극된다. 악귀를 물리치는 의미인 '귀면와(鬼面瓦)'처럼, 도깨비들은 벽사의 의미뿐일까? 도깨비의 원형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 '도화녀와 비형랑'조에 나온다. 진평왕 때 이야기다. '도화녀'의 신이(神異·신기하고 이상한)한 아들 '비형랑'을, 진평왕이 데려다 궁중에서 기른다. 열다섯 살에 집사벼슬을 주었더니 밤마다 월성을 뛰어넘어 '황천변'에서 귀신들과 놀다 새벽에 돌아온다. 기이한 일이다.  왕이 비형을 불러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 하니 참말인가? " 비형랑이 "그렇소이다"고 답한다. 왕이 그렇다면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아라"고 하니, 하루 밤에 귀신무리들을 부려 비형랑이 '귀교(귀신다리)'를 놓았다. 하루 밤 만에 다리를 놓다니! 신이한 일이다 '비형' 이름만 들어도 겁을 내어 달아났다는 귀신들도 재밌지만, 여우로 화하여 도망가는 귀신들도 재밌다. 알 수 없는 그 도깨비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인생, 알 수 없는 그 역사의 도깨비들, 오늘날도 살아서 우리 주변에 나타나고 있는가? 나는 며칠 전 광화문에 떠다니는 촛불 떼에서 도깨비 불빛들을 얼핏 보았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수많은 도깨비들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는 이 땅, 장항사지 오층 탑신의 도깨비들, 아직도 웃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동쪽 금당터 대좌아래 사자상(獅子像)도 가을 하늘 아래 한바탕 크게 웃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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