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간밤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은 후 새벽까지 뒤척이다 일어났다. 울먹임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뜰에는 바람이 조금 불었고 서너 잎 남은 목련잎이 가지 끝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이제 더는 버틸 생이 아니라며 마치 내일 세상과 하직할 듯 내뱉는 친구의 삶도 목련잎 같다. 바람에 흔들리다가 허공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오늘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갈 예정이었고, 초등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재활치료를 받으러 가야 했다. 계약이 곧 만료될 강의지만 남은 강의 준비를 해야 하고, 외부 학술발표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다. 자신이 짊어진 짐도 버거운데 친구는 끊임없이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함께 고통을 나눌까. 그녀는 오래 망설인 끝에 첫 고속버스를 탔다. 차창 밖은 온통 안개로 뒤덮여있었다. 버스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도로를 달렸다.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산자락이 안개 띠를 허리에 감고 그녀가 탄 버스를 쫓아 달린다. 황금 물결 넘실거리던 들녘은 어느새 텅 비어 있다. 그녀는 속으로 읊조린다.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아~아 이제는 한적한 빈들에 서 보라. 고향 집 눈 속에선 꽃 등불이 타겠네. 시인은 한적한 들에 서서 텅 빈 세상을 바라본다. 빈들에 선 후에야 비로소 이미 져버린 국화꽃을 그리워하게 되고, 기러기의 날갯짓도 심상치 않게 보이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은 쓸쓸한 들녘 너머의 고향을 갈망하고 있다. 고향 집은 그가 첫울음을 울며 소중한 의미로 생을 시작한 곳이다. 빈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시원(始原)을 갈망하는 눈이다. 고향집의 꽃등불은 얼마나 따스한가.  친구의 삶은 텅 빈 들이거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바다일지 모른다. 그녀는, 지금까지 안간힘 쓰고 버티어온 친구가 오 헨리 소설의 '마지막 잎새' 같다.  워싱턴의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아파트에서 사경을 헤매는 무명의 여류 화가 존시는 바람에 떨어지는 창밖의 담쟁이덩굴을 바라본다. 나뭇잎이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며 애처롭게 떨고 있다. 존시는 절망에 빠져 말한다. 저 잎들이 다 떨어지면 내 생명도 끝나겠지… 존시의 절망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친절한 노화가(老畵家)가 혹독한 바람을 견디며 담벼락에 초록빛 나뭇잎을 그린다. 해가 뜨기 무섭게 가슴 졸이며 창가로 다가올 존시, 살아남은 잎새를 보고 기뻐할 존시를 생각하며 추위도 잊고 바쁘게 그렸을 것이다. 무엇이 노인의 마음을 그토록 뜨겁게 달구어 벽에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어둠의 시대, 어느 한순간 인간의 탐욕이 그친 적 없었고, 전쟁이 끊어지지 않았다. 선과 악은 언제나 나란히 평행선을 달려왔다. 하지만 언제나 선이 이길 것이라고 그녀는 힘주어 말한다. 선의 덕목 중 가장 으뜸이 사랑이라면 연민은 사랑의 증표가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사랑을 잃는다면 절망에 빠진 또 한 사람의 존시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했다. 거칠고 메말라버린 그녀의 심연에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을 참으며 마지막 잎새를 그려줘야 할 사람, 그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비로소 그녀의 마음이 가벼워진다. 고속버스가 안갯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시야가 또렷해졌다. 강물이 막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강을 건너자 잿빛 새털구름 안에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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