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우리를 설레이게 한다. 내가 사는 곳은 배반동 '능 마을'이다. 집 가까이 '효공왕릉'과 '신문왕릉'이 있다. 마을 오솔길로 접어들면 멀리 '진평왕릉'도 보이고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도 보인다. '보문사지'와 배반들판이 펼쳐져 있어 그야말로 '노천 박물관'이다. 역사와의 교감을 할 수 있는 경주 최고의 '힐링코스'가 보문들판이다. 눈 가는데 마다, 금당터, 당간지주, 석조유물, 황복사탑, 낭산… 아름다운 경주의 산과 들판이 가슴에 말없이 안긴다. 경주는 진정성의 도시다. 돌멩이 하나 깨진 기와조각 하나, 풀잎 하나에도 천년 역사의 흔적이 서려 있음을 느낀다. 경주에 살면서 나는 천 년 전이 바로 어제인 듯, 문화유산의 현장에 산다는 행복한 체험을 한다. 어제도 저무는 보문들판, 나의 산책 코스를 산책했다. 나만의 '느림의 미학'을 생각하면서, 나를 성찰하면서, 답답한 오늘의 정치판도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영화 같은 사건들, 마술 같은 순간들, 도깨비 같은 사람들,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청량한 공기, 추수가 끝난 텅 빈 보문들판은 얼마나 넉넉한가. 진정성의 도시를 느끼며 나는 한 마리 '나무늘보'처럼, 추수가 끝난 논두렁 길을 걸었다. 아무것도 서두를게 없었다. 서두르지 말자! 이것이 요즘 나의 화두다. (어느 날 티비에서 본 '나무늘보'는 한 시간에 900m 밖에 못 가는, 느려터지게 천천히 가는 네 발 짐승이었다) 이 초고속 시대에 어찌보면 '나무늘보'는 바보 같은 짐승 같기도 하다. 그러나 또 어찌보면 '나무늘보'의 어리석은 듯한 느린 삶도 현대인들에겐 반면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느림의 미학 속에 사는 '나무늘보'한테서 쫓기는 현대인들은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어수룩한 삶일지라도, 느리게 가는 삶일지라도 인내하며 기다리는 삶의 자세가 아름답다. 서두르지 말자! 그날, 보문들판 논두렁길을 천천히 걷든 내 머리위로 헬리곱터 한대가 날고 있었다. '산불예방 합시다' 산불방지를 방송하는 헬리곱터였다. 헬리곱터로 홍보하는 그 아이디어가 좋게 보였다. 황복사 앞 논 바닥엔 왕릉으로 추정돼는 신라유적(무덤의 호석)발굴이 '성림문화재 연구소'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걷는 들길에는 봄도 아닌데 철모르는 민들레꽃이 피어 있었다. 환하게. 조그마한 간이역 같은 그 이쁜 민들레꽃! 실수처럼 피어있던 그 민들레꽃, 그렇다 나도 가끔 길을 잃을 때도 있었지. 인생을 살다보면 너 나없이 한때는 길을 잃기도 하는 법. 나는 그날 천천히 보문들판을 걸으며, 왕릉에게, 헬리곱터에게, 이쁜 민들레꽃에게 질문을 했다. "지금 나는 나의 길을 잘 가고 있는가? 착각을 하며 후회하며 사는 건 아닌가? 12월은 오늘 내게 질문하면서 또한 나를 설레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