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손이 시리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어느새 동지가 내일 모레. 몇 개 남지 않은 단풍잎이 연하장처럼 발끝에 떨어진다. 모두 거두어들여 텅 빈 들판을 걷는다. 들판 가득하던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드문드문 볏짚 몇 단과 쭉정이 콩대가 남아 있다. 나는 이 가을 무엇을 거두어 들였을까. 얼마나 수확했을까. 들판은 훤히 비었는데 가슴이 답답하다. 논두렁을 달려본다. 얼마 가지 않아 숨이 차다. 마른 풀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문득 "조군. 천천히, 천천히 살아도 참 재미있어. 가끔씩 술잔에 비친 별도 마셔보게" 천마총 돌담길에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에서 등을 토닥거려 주시던 권윤식 선생님 생각이 스쳐간다. 환하다. '수정같이 맑은 수면 위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어지럽게 노니는 모습이 들여다보이고 그 위로 십여 척의 유람선이 유유히 떠다니며 그 울긋불긋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물굽이가 완만한 지점마다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한가한 모습이 눈에 띄고 강기슭에는 형형색색의 기화요초들이 미풍에 나부끼고 있다' (권윤식의 수필 '형산강 엘레지' 중에서) 운원 권윤식(1934~2010) 선생은 환갑이라는 늦은 나이에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수필, 칼럼,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로맨티스트였다. 1994년 문학세계 신인상 당선 소감에서 "70에 능참봉… 대낮에도 쓸데없이 어정거리다가 낮잠으로 소일했더라도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문단 등단이 늦은 것이 무슨 대수냐"고.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중·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근화여중고와 경주고 등에서 평생을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뿐만 아니라 한림야간학교에서 교감직을 맡는 등 자비를 들여가며 20여 년간 봉사활동을 한 참 스승이었다. 경주신문 주필과 경주시지 편찬위원을 역임했으며, 경주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신의 원죄','나 이제 청산에 살리라'가 있으며, 서라벌수필문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주고등학교 재직 중에 연극반을 지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쓴 희곡 '신의 원죄'는 1984년 6월 광주에서 개최된 전국연극제에서 경북을 대표한 에밀레극단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명리와 출세는 남의 일로만 여기는 듯 너털웃음이 가득했다. 강약과 명암의 분별 위에 글을 쓰며 낭만과 고집으로 산 만년 소년이었다. 고향을 위해 희곡을 쓰고 이웃을 위해 칼럼이나 수필을 남겼다. 그러나 술에 대한 철학은 끝까지 붙들고 있던 화두였다. 어느 날 쪽샘에서 서영수, 양덕모선생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밤 한 시에 화장터에 찾아가서 인생을 돌아보고 온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인생을 알려면 화장터에 가봐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에 세 사람은 의견일치를 보아 택시를 타고 화장터로 갔다고 한다. 한 사람씩 차례로 들어가 5분씩 명상을 하고 나왔다고 하니, 단순히 술의 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의 고희기념문집에 실린 이희목 시인의 글을 빌려 보면, '경주에서 유일한 석양 무렵의 낭만주의자 / 유달리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선 자연(紫煙)이 계속 피어오르고 / 삼호O.B의 중앙에 점잖게 앉아 / 허공을 지그시 응시하는 모습은 속세의 잡사에서 일탈한 주선(酒仙)의 경지 / 하루 세끼의 밥은 굶을 수 있어도 입에서 담뱃불이 꺼지는 것은 볼 수 없는 지독한 애연제일주의자 / 좌석에서 주흥이 감돌 때면 오른손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곧잘 부르는 '나 청산에 살리라'는 어느 성악가에 뒤지지 않는 미성의 소유자(중략) / 오늘도 어느 한적한 골목으로 / 학처럼 길게 목을 뽑고 사색에 잠겨 걸어가는 노신사' 오늘 밤 술잔에 비친 별을 찾아 한 잔 권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