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2016년 한 해도 아쉽게 저물었다. 지금 한국은 매일 매일이 숨 가쁘다. 요즘처럼 극적인 사건이 매일 일어난 때가 또 있었을까?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움 속의 나날, 큰 변화 속의 나날이다. 충격적인 사건의 역사 속에서 지금 '한국호'라는 배는 어디를 항해 하고 있는가? 나는 천 년전 충격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던 '포석정'을 찾아 오늘은 언양 쪽으로 난 길을 따라 혼자 '포석로' 길을 걷는다. 포석정으로 꺾어지는 길 입구에 경주 '지마왕릉' 팻말이 보인다. 지마왕릉(祗摩王陵)으로 가는 호젓한 남산 오솔길을 걷는다. 안내판을 본다. 신라 제6대 왕 (재위112~134), 파사왕의 아들,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지마왕릉을 보고 발길을 다시 돌려 포석정 쪽으로 간다. 내 머릿속에는 식민지시대 왜? 포석정을 '사적1호'로 정했을까? 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남대문도 있고, 석굴암도 있고, 불국사도 있는데…. 왜일까? 그것은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을 잊지 말라? 아니면 식민지사관의 그들이 위대한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은, 비극적인 그날 후백제 견훤의 군대는 왜 신라왕이 사는 월성으로 바로 쳐들어가지 않고 포석정으로 쳐들어갔을까? (혹, 견훤의 첩자가 신라에 숨어 있어 경애왕의 행방, 첩보를 일일이 다 알려준 것이 아닐까?) 그날, 경애왕 4년(927년) 11월, 포석정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왕은 부인과 빈어(嬪御)로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잔치를 베풀고, 즐기다가 갑자기 견훤이 쳐들어오므로 크게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부인과 함께 성남의 이궁(離宮)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권제50, 견훤조)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들은 또 다른 시각으로 그날의 현장을 비판하고 있다. 경애왕이 11월에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팔관회를 개최하여 국가적 수호를 기원하기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즉, 포석정은 팔관회를 베풀던 종교적 성소였다(강돈구 교수 주장). 그리고 이종욱 교수는 음력 11월은 '유상곡수연'을 할 수 없는 계절이다. 따라서 포석정은 '포석사(鮑石祠)'이며, 포석사는 원래 시조를 받들다가 '화랑 문노(文弩)'의 화상을 모셨고, 여러 화랑들(김춘추도 문희와 포석사에서 결혼식을 행함)이 길례(吉禮)를 올리던 곳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포석정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국민인가? 역사는 되풀이 되는 시간의 수레바퀴인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슬기롭게 현 시국을 극복해 나갈 것이고 응전과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포석정에 들어서면 나는 천 년 전 역사의 비극 때문에 마음이 늘 숙연해 진다. 숙연해지는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그날, 포석정에 수학여행 온 아이들의 질문이 재밌다. "선생님, 여기서 임금이 연회를 즐겼다는데, 연회가 뭐죠?" 나는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교향곡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저무는 포석정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