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공원을 걷는다. 잎사귀를 떨군 나무들이 새해를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독산'을 오른다. 독산 정상에 우뚝 선 김만술 선생의 김유신 장군 동상을 만난다. 금방이라도 갈기를 휘날리며 적진을 향해 달려가려는 듯 힘줄이 팽팽한 말발굽소리. 갑옷에 투구를 쓰고 칼끝을 겨눈 장군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어렸을 적 갓뒤마을 외갓집에 들릴 때면 황성공원 너머로 동상을 바라보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외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장군의 무용담은 몇 번을 들어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까까머리 촌놈이 장군의 꿈을 키우던 사금파리 같은 유년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나의 현재 위치는 어디쯤이던가. 계단을 내려오다가 휘청 발을 헛디딘다. 아득하다. 수월(水月) 김만술(1911~1996)은 신라 조각의 맥을 되살려 낸 장인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서울미술학교를 마치고 일본 동경 히나코 지츠조 조각연구소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광복 직전 두 번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시작으로, 해방 후 제1, 2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상하는 등 중앙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인물상은 인체의 실재감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묘사력을 볼 수 있다고 평가된다. 김만술의 순수미술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은 1945년에 제작한 '해방'이다. 젊은 남자가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어내고 있는 모습으로, 민족의 해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70cm 정도의 석고상(청동으로 주조됨)이지만, 인물의 받침대가 한국 지도의 형상이며 의지에 찬 얼굴 표정과 상체를 구부려 힘을 응축해서 밧줄을 끊으려는 듯한 자세다.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조형화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인물이지만 '말', '사자' 등 동물조소에도 매우 뛰어났다.  대표적으로 언제나 접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서라벌문화회관 앞에 있는 모자상과 황성공원의 김유신 장군 동상이 있다. 모자상의 표정에 나타난 자애로움과 사랑, 김유신 장군 동상에 나타난 용맹과 당당함에서 이 작가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노년까지도 의욕이 왕성하여 남산의 동남쪽에 터를 마련하여 조각공원을 조성하려는 시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은 대구 망우공원의 곽재우 장군 기마상, 대구 경북대강당의 비천군상, 경주중고 교정의 수봉선생상 등 무수히 많다. 그 공을 인정받아 제6회 향토문화상과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또한 경주예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교 운영과 유지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여 향토미술계를 지켜온 작가이다. 1956년 지역의 각 기관장, 학교장, 예술계 인사 등 지역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김만술 조각연구사업 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으니 그에게 거는 기대가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말년에 김동리, 박목월, 손일봉, 박봉수, 김범부 등 경주출신 문화예술인의 흉상을 다수 제작했다. 신라불교조각연구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으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는 막걸리와 소주를 즐겨 마셨는데, 혹 양주 선물이 들어오면 소주로 바꿔 마실 정도로 소탈했다.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유머감각과 호탕한 성격에 노년까지도 오토바이를 즐겨 탄 멋쟁이였다. 젊은 시절 경주~부산간 직행버스 기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 "차라리 다리라도 부러지면 조각에 전념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할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새벽운행을 위해 숙소에 드는 날이면 잠들기 전까지 소품이라도 만들다 머리맡에 흙을 두고 잠이 들었다고 한다. 모든 시간을 오로지 작업에 몰두했던 진정한 장인이었다.  다시 계단을 오른다. 느슨해진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독산을 오른다. 김유신 장군의 말안장을 다듬고, 칼끝을 벼리던 수월 선생의 숨소리를 듣는다. 화랑, 원화가 손을 높이 들어 임신서기석을 마주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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