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총각 한수는 새해 특집 신춘문예 수상 기사를 읽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작년 한 해도 열심히 시를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또 떨어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계약직으로 생계를 꾸려온 지 15년, 때로는 공사판까지 떠돌면서 오직 한 길, 등단을 하기 위해 틈틈이 시를 썼다. 연애 한번 하지 못하고 가파르게 건너온 불혹의 나이 앞에 잠시 마음이 아득해졌다.  그는 십 년 동안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꿋꿋하게 시를 쓸 힘을 달라고 늘 신에게 빌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이의 수상작을 읽는 기분이 예전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여느 때와는 다른 속삭임이 들려왔다. "네 시는 무엇이 문제였지?" 수많은 기성 시인의 시를 필사했고, 오마주 시를 지었고, 사전을 찾아 빼곡한 단어를 깨알처럼 나열해놓고 난해하고 생소한 단어를 바꿔 넣어가며 쥐어짜듯 시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유희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지만, 영혼이 소멸한 죽은 시라는 평을 들었다. 묵상을 하던 그는 이윽고 자신의 시가 빈 깡통처럼 시끄럽기만 하다는 반성에 이르렀다. 그는 벽을 에워싼 책장을 둘러봤다. 천장 가까이 꽂힌 알리기에리 단테의 '신곡'이 눈에 띄었다.  그 많은 책 중 하필 단테일까. 그것은 늘 자신을 지켜보는 신의 인도인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폈다. 중세의 암흑을 깬 '영혼의 시인'이라는 말이 뼛속까지 사무쳐왔다. 단테를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읽다가 번번이 손을 놓았던 책이었다. 그는 두꺼운 신곡을 꺼내 예전에 밑줄을 그어 놓은 문장을 읽었다. 단테는 영혼의 순례자였다. 한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다! 문제는 영혼이었다.  공사판에서 돈을 벌면 쓰지 않고 모았다가 유명한 세계 여행지를 두루 다닌 한수, 그는 자신의 영혼이 얕은 개천에 갇혀 안주해왔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단테에게 물었다.  "위대한 시인이여, 당신의 영혼을 인도한 이는 누구입니까"  단테를 인도한 이는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와 로마의 철학자 베르길리우스였다. 한수는자신의 인도자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가 믿는 신과 수많은 책이 있었다. 여행을 떠날 때는 미리 계획을 잘 짰지만, 새해를 맞으면서 여태 한 번도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던 그는 새 노트를 꺼내 올해의 계획표를 짜기 시작했다. 그는 독서 목록에 1월이라 적고 '단테의 신곡'이라 썼다. 이제 읽기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무슨 일이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어. 그는 단테가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듯 책 속의 영혼을 순례하겠다고 마음먹고 신곡 속으로 천천히 눈길을 옮겼다.  단테는 아홉 살 때 베아트리체를 알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온몸의 혈관이 춤을 추었다.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구 년이 지난 어느 날 단테는 거리에서 다른 여인과 걸어가는 베아트리체와 마주쳤다. 그녀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끓어오르는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마음을 감췄다. 이미 어릴 때부터 도나티 가문의 젬마와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풍습은 혼약을 깰 만큼 자유스럽지 않았다. 단테는 결국,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마음속에 깊이 묻어버리고 젬마와 결혼하고 만다.  일 년 후 베아트리체도 바르디 가문의 시모네와 결혼한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다. 겨우 스물넷이었다. 괴로움과 상실감 속에서도 단테의 사랑은 더욱 강렬해지고 깊어갔다. 이미 네 아이를 둔 단테, 깊은 신앙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단테로서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단테는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을 성취하고자 그의 작품 속에 베아트리체를 천상의 여인으로 소생시킨다. 생과 사를 초월한 두 사람은 함께 순례의 길에 오른다.  한수는 신춘문예 등단의 꿈이 이승에서 이룰 수 없었던 단테의 사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이 승화되어 영혼의 순례를 하듯 자신의 시에 대한 사랑도 더 깊고 높은 곳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한수는 베아트리체를 만나러 가는 단테를 상상하며 책장을 넘겼다.  "천사가 나타나 시인들에게 불길 속을 지나가라고 말한다. 망설이던 단테는 불길만 지나면 베아트리체를 만날 수 있다는 베르길리우스의 말에 용기를 내어 불 속으로 뛰어든다" (신곡 연옥편 제27곡)  한수는 이 구절에서 용기를 얻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단테처럼 올해도 또, 풍랑이 몰아치는 시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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