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용맹무쌍했다. 나폴레옹은 '한 마리의 사자와 여덟 마리의 양으로 구성된 군대와 한 마리의 양 대장과 백 마리의 양으로 구성된 군대가 싸울 경우 전자(前者)가 이긴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조직의 규모나 외형보다 강한 리더와 응집력을 강조했다. 그는 마술(馬術)에 뛰어나 언제나 말 위에서 전투를 지휘했고 당시 '그가 전장에 모습을 나타내면 이는 4만 명의 전력과 맞먹는 것이다'라고 평가될 정도로 위용이 당당했다. 그는 피아 대치상황에서 사령관이면서도 앞장서 돌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의 부하들은 열광하듯이 전투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의 군대가 이렇게 용맹하게 된 그 리더십의 근저에는 부하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었다. 야심 가득 찬 독재자 나폴레옹의 용인·용병술을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위장(僞裝)이라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의 부하 사랑은 비록 위장이라 하더라도 대단하다. 사령관 나폴레옹이 전선에서 야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초소에는 전투에 지친 초병들이 총도 버리고 자고 있었다. 치명적인 군무위반 상황! 나폴레옹은 초병들의 총을 손수 거두어 가지고 그들이 깰 때까지 지키고 있었다. 초병들이 잠을 잔들 얼마나 오래 자겠는가. 그들은 깨어나자 사령관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하여 엎드려 처벌을 자청했다. 작전의 실패는 용서될 수 있어도 경계의 실패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오히려 그 초병들의 전투 피로를 위로한 뒤 초소를 떠났다. 그들은 그 후 전투에서 목숨을 던져 싸웠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어느 날 밤 문무신하들과 연회를 개최했다. 연회 도중에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등불들이 꺼졌다. 그때 어둠 속에서 여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장왕의 애첩을 희롱한 것이다. 그 애첩은 희롱한 자의 모자(冠) 끈을 잡아뗐다며 모자 끈이 없는 자가 범인이니 잡아 달라고 했다. 불이 켜지면 한 사람의 목이 날아갈 경색된 순간이었다. 이 때 장왕은 등불을 켜지 말고 그 자리 참석자 모두에게 각자의 모자 끈을 떼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하여 애첩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함으로써 연회 분위기를 되살리고 부하를 보호한 것이다. 유명한 절영지연(絶纓之宴)의 고사이다. 몇 년 후 장왕이 정(鄭)나라와의 전투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장수가 선두에 나가 눈부시게 싸우기 시작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전세를 뒤집어 이길 수 있었다. 그 장수는 연회장에서 모자 끈이 뜯긴 장수였고 그 때 왕이 목숨을 살려준 데 대한 은혜를 목숨을 걸고 갚은 것이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장군 오 기(吳 起)는 병법에 뛰어나 손자와 쌍벽을 이루어 손(孫)·오(吳) 병법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는 전쟁에 나갈 때 말도 타지 않고 부하들과 똑같이 보병으로 출전했다. 병사들과 함께 맨땅에서 잠을 잤으며 전투 중에도 부하의 몸에 난 종기 부위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연저지인'이라고 불리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지휘관의 '사랑'에 어느 부하가 목숨 걸고 싸우지 않겠는가. 조조가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원소를 꺾고 중원 북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원소 측이 남긴 것들 중에 조조의 신하 중 사전에 원소 측과 내통한 자들의 명단이 포함된 문서를 발견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모두 소각 처리해줌으로써 신하들의 감동과 절대 충성을 이끌어 낸 일이 있었다. 다소 간교해 보이기는 해도 조조의 관용적 리더십의 일면을 보여준 일화라 할 수 있다. 진실된 사랑이 있고 위장된 사랑도 있다. 위장된 관용도 있다. 비록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위장된 사랑이나 관용이라 할지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을 때가 있다. 지휘관의 부하 '사랑', 상관의 하급자 '관용'은 언제 어디서나 조직관리 리더십의 근본 바탕이 된다.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쓴 자를 이기지 못한다. 일상에서도 죽을 각오로 일하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 리더가 부하를 사랑하면 부하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