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단 말 대신에 웃음을 보였는데/ 모르는 체 하는 당신 미워 정말 미워/ 미워한다 말할까 싫어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 못해 나는 여자이니까.'  오래전 유행한 노랫말 일부다. 사랑한단 말도 못하고 싫어한단 말도 못했는데 그 이유가 '여자이니까'란다. '~이니까'가 이렇듯 '사회 약자'들이 자포자기나 절망의 단어로 사용되는 현실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반면 가진 자들은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사용한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니까" "못 배웠으니까" "못났으니까" "비정규직이니까"로 자신 탓을 하며 고통스런 세상을 살아갈 때, 상위 1%는 "국회의원이니까", "재벌이니까", "예쁘니까", "정규직이니까"로 특권을 과시하며 당연한 듯 쾌락을 즐기며 삶을 살아간다.  본인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열심히 일해서, 정말 예뻐서 그렇게 특권을 누리는 건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각자 노력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불평은 없으리라.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그들만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이젠 실세의 등에 업힌 '비선실세'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이다. 권력과 재력을 대물림하기 위해 갖은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는 걸 보면서 참을 대로 참아온 민중들의 불만과 원망이 횃불 되어 타오르고 있다.  오래전 88올림픽 때의 일이 생각난다. 출입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신분증을 출입증과 교환해야하는 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외국 외교관도 예외 없이 신분증을 출입증과 바꿔 들어가는데 웬 사람이 신분증을 내지 않고 그냥 들어가려기에 설명을 하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랬더니 "나 몰라?"하면서 막무가내로 그냥 들어가려고 했다. 안된다고 했더니 자신이 '국회의원'이란다.  그때 "모두가 지켜야할 법을 만들면서 자신들은 예외라 생각하는 자들이 만든 게 우리나라 법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자신이 특권을 가진 자라 생각하는 이들의 의식은 바뀌지 않은 듯해 씁쓸하다.  '~이니까'를 자신의 권한을 위해 사용하니까 세상은 시끄럽고 불안하다. 신분사회일 때도 가진 자의 의무가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곧 고귀한 신분(노블레스)의 도덕적 의무(오블리주)는 법적 강제성을 갖지는 않지만 자발성에 기초를 하고 있다. 법으로 강제하는 게 아니므로 더욱 의미와 가치가 있다. 법은 최소한이기 때문이고 이를 면책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자발성은 무한하고 도덕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책임과 의무와 권한은 '삼면등가의 법칙'이라고 한다. 책임과 의무와 권한은 정삼각형의 세 면과 같다는 말이다. 오늘날 가진 자는 과연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권한만 휘두를 뿐 자신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시하므로 오늘날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고, 갈등은 깊어진다.  '~이니까' 특권만 누리려 할 게 아니라, '~이니까'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 한다면 갈등은 없을 게 아닌가. 언제쯤일까? 갈등 없는 사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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