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다. 대학교 주변에서 채소장사를 하면서 고학하여 졸업 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어느 젊은이에게 기자들이 찾아 질문을 했다. "가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난의 정의가 무엇이냐?". 그 수석 졸업생의 대답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가난은 수치도 아니고, 생활하는 데 약간 불편할 뿐"이라고 했다. 가난이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빈곤한 상태를 말한다. 현재 나이로 60세 이상의 국민들은 대다수가 가난을 몸소 체험한 연령의 세대들이다. 가난에 대한 정의도 몇 개 있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는 끝이 없어 개인은 물론 나라의 힘으로도 어렵다는 뜻이다. '가난이 원수'란 가난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니 가난이 '원수'같이 느껴진다는 말이겠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은 치르기 힘든 일이 자주 닥침을 비유하는 말이다.  해방이후 우리 민족이 당하는 가장 큰 악재가 가난이었고, 어딜가나 함께 따라 다닌 것이 바로 가난이었다. 가난하여 살기 어려운 것이 '빈곤(貧困0'이다. 지금의 세대들에게 가난에 관한 교훈은 금지해야 할 사항이다.  초등학교 입학 시에 아이가 갖는 책가방 하나가 쌀 한가마니 값이란걸 알면 이해할 사람이 몇이 될까. 메이커 없는 장신구나 의복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아이들에게 가난이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런지 오히려 어른이 걱정스럽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이 "가난은 강도같이 들이닥치고 빈곤이 거지처럼 달려든다"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 가난하면 이웃도 싫어한다. 가난뱅이에게 아첨하는 인간은 없다.  가난은 가난하다고만 하여 결코 불명예가 아니라, 문제는 그 가난의 원인이다. 가난이 나태나 자기의 고집, 어리석음의 결과는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며 그런 경우에만 가난의 죄를 논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없는 가난함은 비참한 부유보다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악덕은 사람의 재물 때문에, 미덕은 가난 때문에 가려져서 안 보인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난하면 성실하게 살기가 힘들어지고, 좋은 천성도 부끄러워질 만큼 비굴해 진다는 것이다. 가난이 범죄의 어머니라고 한다면 정신적 결함은 그 아버지라 하지 않은가. 가난은 어떠한 재난보다도 선인(善人)의 마음을 시들게 하고 깊은 상처를 남기는 재앙이다. 사람이 가난한 것은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속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물(所有物)'에 집착하면 가난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수 없고 자기 자신을 줄 수 없을 때에 가난해진다. 지식인들 사이에 가난에 대한 공포는 우리의 문명이 앓고 있는 최악의 도덕적인 질병이라 성인들은 말한다. 물론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도 있다. 먹고 살기 위하여 하지 못할 일까지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범죄가 생기는 것도 가난이 범죄의 수단이 되어버린 세상. 있는 자가 베풀고 헌신하는 것만이 가난을 해결하는 무기가 된다. 지금의 현실은 우리는 가난을 모르거나, 가난을 잊고 사는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가난은 인류 모두가 겪는 피할 수없는 죄악(罪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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