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아침 아직 새벽은 멀었다 아아(峨峨)한 산맥 마을과 고을 봄이 올 때까지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움 설움을 터뜨리지 말라 김유신 장군의 묘가 있는 송화산 순환도로 끄트머리쯤에 이 시 '종(鐘)'의 마지막 연이 새겨진 박종우 시인의 시비가 있다. '고무신(古無新)'이라는 호를 쓴 박종우(1925~1976) 시인은 새벽을 기다리며, 아니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어둡고 추운 시간을 몸부림치며 산 시인으로 내게 인식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꿈꾸는 새벽이 있고 바라는 봄도 있게 마련이다. 꿈꾸고 바라는 희망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기다림의 시간도 굳세고 치열하리라. 나는 그리 믿는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허물어지고 나약해질 때는 우리가 기다리는 새벽과 봄의 희망을 떠올려 볼 일이다. 거기서 지금 내가 아직은 터뜨리지 말아야 할 설움의 가치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보라. 가슴 터질 것 같은 날들이 비단 어제 오늘뿐이던가.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애써 변명을 널어놓아야 할 일이 부지기수인 것을. 이제껏 무엇 하고 살았느냐,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더라도 돌아보아 흥청망청 허투루 살지도 않았다. 어느새 머리는 희끗희끗 한데 여전히 새벽은 오지 않고 봄은 멀다. 하여 서산에 해라도 지는 광경을 바라보다, 대체 무엇을 바라며 여기까지 살아온 것일까, 한숨이 깊어질 무렵이면 어딘가에서 정체도 모를 설움들이 치밀어 오른다. 붉은 놀처럼 하늘 한쪽을 물들일 만큼 붉고도 붉은 설움들, 그러나 아직은 아직은 터뜨리지 말아야 할 설움들, 그 설움들의 산맥이 짙어온다. 아마도 고무신 박종우 시인의 '종'은 그 설움의 산맥이 해를 넘길 무렵, 시인으로서 살 수 있는 가장 치열한 삶의 표현으로 태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경남 울주군 상북면에서 태어난 시인은 1950년 초반 경주공고, 문화고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경주문협 회원으로 활동했다. 유치환, 김동리 선생 등과 청맥동인회를 결성해 '청맥' 1호를 펴냈다. 교사 활동을 정리한 뒤에는 상경하여 '자유공론' '젊은 세대' 등의 편집국장과 재향군인회 공보실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1976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시인협회, 100인문학회 등에서 활동했다. 시집 '조국의 노래' '습지' '양지' '한 알의 씨앗을 위하여' '다시 가을에' 등과 수필집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를 펴냈다. 그러나 '고무신'이라는 호도 그렇거니와 시인은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기인(奇人)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교사로 있을 때는 며칠씩 사라졌다가 비행기를 타고 나타났는데, 알고 보니 비행기가 타고 싶어 조종사인 친구를 찾아가 며칠을 간청한 끝에 비행기를 탔다거나, 조지훈 시인의 이름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해대다가 얻어맞았다느니, 청마 유치환 시인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무얼 던졌는지 청마의 이마를 찢었다느니, 하여튼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 잦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를 두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혼을 가졌다거나, 또 누군가는 주벽이라 말해버리지만 과연 그래서였을까. 혹 기다림이 깊어, 설움이 차올라, 어찌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몸부림이 시인의 저 깊은 밑바닥에서 마그마처럼 끓어오른 건 아닐까. 대체 그의 기다림은 얼마나 고상하기에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설움으로 들끓어야 했을까. 기다림이 사라진 인생, 그래서 설움조차 없는 인생이지 않기를 나는 소망해본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인생을 낭비한 죄가 가장 큰 죄일 것이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 불성실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정신적 범죄라던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자칫 우리 자신에게 불성실하다. 기다림과 설움을 터뜨린 채 너무 일찍 종을 울려버린 인생이라면 참으로 곤란하다. 내게 주어진 이 한해를 살기 위하여 다시 든든한 내진설계와 내진공사를 해야겠다.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작심삼일을 반복하더라도 하루하루를 우직하게 살아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