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personnel management)는 아무나 그냥 한다고 인사가 아니다. 인사는 따뜻한 가슴에서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다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인간 존재 내·외적인 악마성에 관한 그리고 인간 사회의 잔인성에 대한 인식과 엄중함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인간 세계에 악마(惡魔)는 있는 것일까? 있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일까? 파우스트(Faust)가 유혹 당해 계약을 맺은 형상화된 악마의 이름은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다.  그 메피스토펠레스는 실제 어디에 위치하고 어떤 모습으로 있으며 어떤 힘에 의해 조정·통제되기도 하는 것일까? 종교적인 접근이 아니다. 인문 사회적으로 접근해 보자는 것이다. 히틀러가 정치경력 초기에 정당 찬조 연설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대중연설 기회였다. 앞 연사의 연설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보통 사람들처럼 긴장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도 났다. 이윽고 본인 차례가 되어 연단에 오른 그는 스스로에 대해 놀랐다. 연설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때까지의 공포는 사라지고 대중을 휘어잡아 열광시키는 자신의 힘을 확인한 것이다.  그의 내면에서 잠자던 악마(?)가 깨어난 것일까? 이때부터 그는 웅변에 자신을 얻고 본격적인 대중 선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독재자가 되어 강한 독일을 기치로 내걸고 전쟁을 일으켰다. 죄 없는 무수한 생명을 죽이고 세상을 피로 물들이다가 본인은 자살했다. 인류 역사의 광란의 비극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주로 비행기와 같은 정밀한 기계장치에 고장을 일으킨다고 하는 작은 악마를 '그렘린'(gremlin)이라고 한다. 작고 귀여운 악마로 표현되기도 하며, 영화로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어떤 군인이 밤에 그렘린이 격납고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을 봤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이런 악마도 진짜로 있는 것일까? 인간 잔인성의 극(極)은 어디일까? 한 없이 몸서리치게 가버릴 것 같은 인간사회의 잔인을 우리는 보아왔다. 고대 중국의 잔혹한 형벌들은 언급하기조차 끔찍하다. 그것들도 통치와 인사행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어른들이 서로의 아이들을 바꿔서 잡아먹었다.  징비록에는 한양 도성 사람들이 사람 시체를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漢) 고조가 된 유방조차도 수수 전투에서 항우에게 패해 도망가다가 두 자식이 짐이 되자 또 낳으면 된다고 버렸다. 그러나 수행하던 하후영이 천하를 도모하려고 하면서 자식을 버리면 만민이 따르지 않는다고 강하게 만류하여 다시 데려간 적이 있다. 자식이기 이전에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이 정도일 수도 있는 것인가?  세상에 빛도 있고 어둠도 있다. 빛은 어둠을 보지 못하고 어둠은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도 빛과 어둠은 같은 데 있다. 그러나 서로 공존하지 못한다. 이것은 적어도 절대적인 차원(dimension)의 문제이다. 선과 악도 이처럼 차원을 달리하되 공존하며 어느 순간 뒤바뀔 수가 있다.  우리 존재, 우리 사회 내·외에 웅크리고 있기도 할 악마는 유혹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특혜라는 달콤한 모습으로 얼굴 내밀 때도 있다. 가끔은 히틀러의 악마의 경우와 같이 '인사'라는 이름으로 '잔혹사'(殘酷事)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세상의 악마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계약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렘린처럼 정밀 속에 숨어 갸웃거리기도 한다. 악마는 종종 디테일 속에도 있는 것이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 그러므로 관리자는 주위를 살피고 주변의 말을 듣되 자율적으로 '통할'(command and control)하지 않으면 결국 인사의 실패로 이어질 수가 있다.  인간과 그 존엄에 대한 그리고 인간사회 어딘가에 스며있을 수도 있는 악마와 잔인성 따위에 대한 처절한 통찰과 설산(雪山)의 내공을 바탕으로 의연하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인사관리는 디테일에 치밀하고 섬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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